일 기 2007년 07월 17일 12시 24분

생각이 다르면 비판하라

최근 '남성 페미니즘(남성 페미니스트)'라는 주제로 몇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 날 이 자리에는 '남성 페미니즘'이란 주제 이외에도 '페미니즘 정치'라고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대화가 오고 갔다. 그리고 이 토론이 끝나고 얼마 후 '여성주의, 여성, 군대, 군사주의'에 관한 토론도 하게 되었다.

이 두 토론회에는 '남성'(내가 표면적으로 느낀 그들의 성-정체성임을 밝힌다)들이 참여를 했고, 나는 이 두 토론회에서 이들의 동일한 태도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과 페미니즘 사이에 거리를 두고('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나는 페미니즘을 잘 모른다')라고 말하며 페미니즘에 대한 '조언', '충고', '배려'를 하려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조언', '충고', '배려'하면서 페미니즘에 대해 우호적이라고 말한다.

이런 '조언', '충고', '배려'의 말에는 자신들의 입장이 녹아져 있다. 그것은 페미니즘 정치 혹은 페미니즘 담론에 대한 (스스로의 입장이 담긴) 이견이다. 페미니스트이든 아니든 페미니즘을 잘 알던 모르던 생각이 다르면 비판을 할 일이다. ' '조언', '충고', '배려' 하는자'라는 위치 설정은 다분히 위계적이다. 이것은 '대화'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생각이 다름에도 '비판'하기 보다 '조언', '충고', '배려'하려 하는 것은 페미니즘이 삶정치(biopolitic)임을 부정하는 것이다. 삶정치와 삶정치 사이의 차이는 비판과 대화를 통해 생성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 둘 사이가 '조언', '충고', '배려'라는 위계적인 태도로 관계 맺게 된다면 그것은 공멸의 지름길이 될 것이다.

생각이 다르면 비판하라. 대화하라.
그리고 생각이 달라도 서로에게 중요한 가치를 배웠다면 같이 춤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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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 홍대 앞 지하보도

    Tracked from 흔들리며 피는 꽃 2007년 07월 18일 17시 28분  삭제

    <font style ='font-size: 9pt; font-family: 1184252_9;'><FONT style="FONT-SIZE: 10pt; FONT-FAMILY: 1184252_10"> <P align=center>&nbsp;</P><FONT style="FONT-SIZE: 10pt; FONT-FAMILY: 1184252_10"> <P align=center><BR></P> <CENTER>다녀가셨군요, 언니들.</CENT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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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요새 난 그런자식들 보면 때려주고 싶더라.
    폭력은 역시 좋은건가봐.

    2007년 07월 18일 21시 17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성주의 모임 n[앤]과 함께하는 2개의 세미나!

 

- 두 개의 세미나가 여름방학 동안 진행해요.

관심 있는 분들은 모두 오세요!

 

 

 

 


첫 번째__n[앤] 세미나 모임에 "불편한 세미나"

세미나 문의: 010-9117-4608 (날래)

**변경되는 일정은 <불편한 세미나> 게시판을 통해 공지하겠습니다.



7월 11일 땡땡

[현대 사회의 성*사랑*에로티시즘], 앤서니 기든스, 새물결, 1996.6.

서문/10장 민주주의로서의 친밀성
[한국의 탈식민 페미니즘과 지식생산], 태혜숙, 문화과학사, 2004.12.

17 한국 페미니스트 문화정치의 실천

 

7월 18일
[이념의 속살], 임지현, 삼인, 2001.6.

4부 해방의 역사학과 역사학의 해방

 

7월 25일

[녹색희망(아직도 생태주의자가 되길 주저하는 좌파 친구들에게)], 알랭 리피에츠, 이후, 2002.10.

머리말/3부 새로운 정치세력

 

8월 1일

[한국의 탈식민 페미니즘과 지식생산], 태혜숙, 문화과학사, 2004.12.

09몸, 바흐찐, 페미니즘 /10몸의 정치, 성차의 윤리 : 이리가라이

 

8월 8일

[한국의 탈식민 페미니즘과 지식생산], 태혜숙, 문화과학사, 2004.12.
11흑인 페미니즘 이론에서의 ''몸'' /12아시아계 디아스포라 여성과 ''몸으로 글쓰기''

 

8월 15일

[유목적 주체(우리시대 페미니즘이론에서 체현과 성차의 문제)], 로지 브라이도티, 여이연, 2004.5.

서론




두 번째__n[앤] 편집위에 "육쾌한 세미나"

세미나 문의: 016-9668-3307 (영롱)

 

여성주의, 군사주의, 군대, 대학 내 군대문화



<여성주의 저널 n[앤]>은 창간호 주제를 <여성주의, 군사주의, 군대, 대학 내 군대문화>(가제)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래서 n[앤] 편집위원회에서는 이 주제로 6회의 세미나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이 주제에 관심있는 독자들도 함께 했으면 합니다.
매회 세미나 일정과 자료는 <세미나1-군대 알기>에서 확정할 계획입니다.


세미나 일정

(*추후 일정은 변경될 수 있으며, 변경 사항은 n[앤] 클럽에 공지하겠습니다.)


세미나1) 군대 알기
일시: 2007년 6월 21일 목요일 오후 7시
장소: 미정)
세미나 자료: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보고 오기. 각종 군대에 대한 자료들을 읽고 오기


세미나2) 군사주의 이해하기
일시: 2007년 7월 9일 월요일 오후 7시
장소: 미정
세미나 자료: <군사주의에 갇힌 근대>(문승숙 지음, 또하나의문화, 2007)


세미나3) 여성주의와 군사주의
일시: 2007년 7월 16일 월요일 오후 7시


세미나4) 대학 내 군대문화
일시: 2007년 7월 23일 월요일 오후 7시


세미나5) 일상 속의 군사주의
일시: 2007년 7월 30일 월요일 오후 7시


세미나6) 대안들: 대안적 남남관계, 그리고 ...
일시: 2007년 8월 6일 월요일 오후 7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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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발 좀 같이해요...비참해ㅠ 크크크

    2007년 07월 09일 01시 34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2007년 07월 10일 17시 17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강조는 uGonG 입니다.
<남성 페미니스트>이라는 주제로 이어지는 참고 글입니다.

==========
언니네트워크 월례토론회 “뜨거운 감자” 7월 주제 : “남성페미니스트를 고민한다” 발제문

2005-7-13 시타 (sitafight@freechal.com)


1.

“남성페미니스트를 왜 고민해야 하는데?” 라는, 상당히 시니컬한 질문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남성페미니스트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이 '문제'에 대한 여성페미니스트들의 태도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얼마 전까지 아주 완고하게, 남성페미니스트를 내 고민의 의제로 삼는 것을 거부해 왔다. 남성페미니스트라 주장하는 남자들에게 맞은 뒤통수가 몇 번이며, '그나마 나은 남성'을 남성페미니스트로 만들기 위해 허비한 나날은 또 얼마나 새털같이 많았던가. 여러 번 상처받은 사람은 언제 다시 그 상처가 반복될 지에 대한 강력한 안테나를 지닌다. 남성페미니스트의 존재와 방식에 대해 여성페미니스트들이 갖고 있는 의심과 엄격함은 매우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결과다.

2.

"우리에게는 '성별 배신자'가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많은 배신자가 필요하다." 샌드라 바트키는 {남성 페미니스트}라는 책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무나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남성에게 과연 남성이라는 성별을 배신하는 것이 절박한 일일까 하는 의구심은 여전히 남는다. 페미니즘이 '누군가를 위한 좋은 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어떤 것일 때, 나는 그 사람이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으로 이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만났던 많은 남성들은 페미니스트 여성과 친하다거나 어떤 모임을 같이 했다거나 페미니스트의 애인이라는 이유로 '친-페미니스트'의 자격증을 딴 것처럼 행동했다. 즉, 자신에게 필요하거나 득이 되거나 인생 사는데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경우에만 '성별을 배신'했다. 이런 점에서, '남성페미니스트'라는 존재에 대한 고민이나 의문이 여러 해 동안 오리무중이었던 것은, 사실 그 고민을 진전시켜 줄 새로운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남성페미니스와 '따로 또 같이' 나아가는 것을 고민할 수 있으려면, 일단 '따로 또 같이'를 할 만큼 독립적인 남성페미니스트가 '있어야' 할 거 아닌가?

3.

그렇지만 이 모든 이유 있는 시니컬함에도 불구하고, 남성을 하나의 동질적인 집단으로 가정하는 것이 좋은 것도 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발견을 새롭게 하게 된 건, 여성학 강의를 하면서 만나게 된 '다른 남성들'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부터다. 자신이 게이라고 밝힌 한 남학생의 기말고사 답안지를 보면서, 가령 군대에서 원치 않는 성경험 공개나 집단적 문화로서의 성구매가 '게이 남성'에게 어떤 다른 경험일지에 대해 생각했다. 어린 시절 동네 형에게 성추행 피해를 당했지만 "지금도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끝까지 성폭력이라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던 남학생의 쪽글을 읽으면서, 폭력을 문제화할 때 성별을 생물학적 실체로 다루지 말아야 할 구체적인 이유와 지향을 생각했다. 기존의 '남자다움'에서 벗어나서 살려고 할 때마다 주변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고 호소하는 남학생의 발표를 들으며, 그 호소를 경청하고 격려하는 것이 여성들의 감정노동이 아니라 남성들의 지지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바램을 가졌다. '남자들'이라는 말 속에 포함시킬 수 없는 사람들이 여전히 '남성'의 경계 안에 혹은 그 이름 뒤에 조용히 숨죽인 채로 살고 있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숨죽인 채로조차 '남성'이라는 범주 안에는 더 이상 기거할 수 없을 정도로 '남성'을 더욱 적나라하게 해체하는 것, 그래서 수많은 '다른' 남성들, '남성'이 아닌 남성들의 얼굴이 햇빛아래 드러나서 집단적 남성성에 부여된 힘이 무력해지게 하는 것이다.

4.

그러기 위해서, 여성과 비슷하거나 여성인척 하거나 여성의 친구 혹은 애인으로서가 아니라, '남성'으로서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그리고 다시 남성성의 그늘 안으로 되돌아가지 않게 서로 지지할 수 있는 남성페미니스트 집단이 형성되어야 한다. 이제 여성인 나는, 남성을 가르치거나, 배려하거나, 보살피거나, 이끌어주는 노력 이전에, 혹은 그렇게 하다가 나가떨어져서 "남자한테 뭘 기대해?"라는 말을 되뇌기 전에, 내가 여성주의자로서 어떤 남성과 손을 잡고자 하는지에 대한 입장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문제는 항상 손을 잡고 싶어지는 남성이 별로 없다는 데에 있지만 말이다.) 남성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남성페미니스트란 가능한지를 그렇게 열렬히 질문할 필요는 없다. 그 답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 자신에게 있으므로. 오히려 여성인 내가 가져야 할 것은, 남성을 동질적 집단으로 상상하게 하는 경험적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동질적이지 않으며 또 않아야 한다는 지향과 상상력이 아닐까 한다. 언젠가 손잡고 싶은 남성페미니스트가 출현한다면, 그들에게 내밀 손을 아껴두면서 말이다.


출처:

http://www.unninetwork.net/action/board ··· dx%3D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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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섹슈얼리티에 이어 요즘 고민 중인 주제는 <남성페미니즘>입니다. 남성 섹슈얼리티와 이어지는 고민이지만
둘의 고민이 꼭 같은 지평에서 논의될 수 있는 것 아닌 듯 합니다.
<남성 페미니스트>라는 책에 대해 충실하게 소개된 글을 퍼옵니다. 굵은 글씨 강조는 uGonG이 한 것 입니다.

=======

남성이 여성운동 주체가 될 수 있나

  
<남성페미니스트>



김윤은미 기자

2004-06-06 23:22:41 

남성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내 개인적인 경험에서 글을 시작할까 한다. 대학교에서 나와 함께 활동하던 (소수의) 남성 페미니스트들은 남성+페미니즘이라는, 그 모순된 정체성 때문에 자기 위치를 잘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남성이라는 사실 때문에 주변 여성들에게 피해를 끼칠까봐 늘 조심스러워 했고, 일종의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도 보였다. 여성 페미니스트들 역시 이들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에 대해 단일한 의견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모든 남성들이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는 대다수의 남성들은 자신이 남성이기에 여성의 경험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양성평등이라는 원칙적인 명제에 동의할 뿐 지적 호기심 차원에서 공부하는 것 이상으로 활동하지 않았으며 ‘오빠 페미니스트’의 이름으로 후배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을 가르쳐주겠다고 나서는, 눈에 거슬리는 상황도 있었다.

남성이 여성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언제 어디서나 논쟁거리다. 일차적으로 페미니즘이 남성에 의해 여성이 억압 받는 현상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 만큼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는 남성은 주변 남성 동료들로부터 “너 왜 그러냐?”는 식의 냉소적인 반응을 받기 쉽다.


한편 여성 페미니스트들의 경우, 남성이 여성의 문제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가의 문제 때문에 그들의 ‘진실성’에 대해 의심하기도 한다. 그리고 페미니스트가 성차별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지칭하기에 남성과 여성 모두 여성운동을 할 수 있다고 이론적으로 분석 가능해도, 현실적으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는 남성들은 실천적인 영역에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성페미니스트>는 여성운동의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쓴 에세이 모음집이다. 여성이 아닌, 남성 스스로가 페미니즘과 자신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흔적은 상당히 새롭다. 이 책은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가/없는가의 문제부터, 여성과 남성의 우정 비교, 양육과 아버지의 문제 등 상이한 주제와 경험들을 다루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남성 또한 페미니즘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는 어려운 점과 자기 스스로 모순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을 진솔하게 고찰하고 있다.



정체성 패러다임에서 실천 패러다임으로


이 글의 저자들은 정체성 패러다임에서 실천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페미니스트로서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 여성운동에 중요하다는 것이다. 산드라 바트키는 <남성 페미니스트>라는 책이 나오게 된 배경으로, 여성 집단 전체가 같은 억압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는 인식이 유효해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녀는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는 여성들이 돈 많은 보수적 조직을 후원하기도 하고 페미니즘을 거칠게 비난하기도 하는” 상황을 볼 때, 여성운동이 반드시 남성 대 여성의 구도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반면, 1970년대 미국에서 등장한 페미니즘의 두 번째 물결인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남성은 남성 그 자체로서 여성을 억압할 수 있다는 사실을 통찰해 낸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때문에 이 흐름은 여성의 경험과 여성만의 독특한 인식이 페미니스트로서의 자기 정체성 형성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흑인페미니즘을 비롯하여 여성 내에서도 다양한 경험과 이론이 존재하며, 여성 역시 여성을 착취할 수 있다는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정체성 패러다임은 한계를 맞이하게 됐다.


저자들은 페미니즘이 여성을 위한 것임에는 분명하나, 여성만이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성 억압을 밝혀내는 역사는, 여성 개개인의 경험에서 출발한 바 있다. 여성의 억압은 계급문제처럼 외부로 객관적인 지표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성 개개인의 억압을 드러내는 것에 중점을 둔다. 그러나 경험은 그 자체로서 해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투명하게 전달되는 경험이란 있을 수 없다. 패트릭 홉킨스는 “경험은 동시에, 언제나, 이미 하나의 해석이자 해석을 요구하는 개념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여성의 경험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 페미니즘 이론의 기반이 되기는 어렵다.


물론 현실적으로 여성들이 같은 여성들의 경험에 대해 더 잘 공감하고 문제점을 인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여성들의 경험이 모두 같다는 전제, 혹은 같은 경험을 공유했기 때문에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명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 책은 남성이 여성의 경험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주체가 되기 어렵다는 명제가 한 가지 다른 전제를 깔고 있다고 비판한다. 즉 남성과 여성에 대한 고정된 젠더(gender) 정체성을 전제로 하여, 이 구별 속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을 배제한다는 것이다. 톰 디그비는 남성과 페미니즘의 대립이 “모든 인간은 남자 아니면 여자로 분류된다는 가부장적 문화의 전형적인 이분법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스스로와의 싸움 직면해야


이 책에 제시된 두 명의 ftm 트랜스젠더(female to male)의 에세이는 페미니스트들이 가지고 있는 젠더 정체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비판한다. 페미니스트와 남성성 이 둘을 긍정하며 지향하는 이들은 젠더에 대한 단일하고 확실한 구별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억압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해리 루빈은 자신이 트랜스섹슈얼임을 “커밍아웃”한 후 여성학과에서 직장을 구할 때 자신의 여자 페미니스트 친구가 “여성으로서 여성학을 배우는 것”을 더 선호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고백하며,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몸을 가지고 있거나 여성성을 수용하거나 혹은 여성으로서의 삶을 경험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정체성 패러다임을 계속해서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제이콥 헤일은 성전환 후 자신에게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들어왔다고 고백한다.


남성과 페미니즘은 모순된 정체성의 결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결론은 어찌 보면 쉽게 나오는 정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지속적으로 불거지는 까닭은, 여성운동을 하는 남성들이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이 가진 장점 중의 하나는 어떻게 하면 남성들이 보다 적절하게 여성운동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 많은 조언을 제공한다는 것이다(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이 책의 영향으로 남성페미니스트 모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남성 활동가들에게 자신의 남성성을 궁극적으로는 긍정하는 것이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효과적인 길임을 조언하는 부분이 눈에 띈다. 해리 브로드는 “남성 긍정성이 친페미니즘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한다.


물론 한계도 지적된다. 데이비드 카한은 남성과 페미니즘이라는 모순된 형태가 ‘가능한가’보다 ‘있음직한가’의 문제 제기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지식인 남성들이 보이는 한계적인 모습들을 허식가(이론을 알지만 생활에서 실천하지 않는 자)/내부자(열심히 일하지만, 정작 자기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자)/휴머니스트/자기학대자(가부장제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자기 탐닉에 빠진 자)로 분류한다. 그는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남자는 가부장제와 싸우는 것이 스스로와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직면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성운동을 하는 남성들이 어떻게 여성들과 함께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이 맞는지는 정답이 없지만, 자신의 행동과 영향에 대한 성찰이 강하게 요구된다는 점은 유효한 지적이다.



www.ildaro.com


 
* '일다'에 게재된 모든 저작물은 출처를 밝히지 않고 옮기거나 표절해선 안 됩니다.

출처: http://www.ildaro.com/scripts/news/inde ··· D8%23o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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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오카 마사히로『남자의 원래 그래?』는 "남성이 자신의 성 이야기를 '나'라는 주어를 통해 이야기했다"는 점이 특징인 책이다.

애초에는 이 책에 대한 긴 서평을 쓰려고 했지만 그것보다는 저자가 책에서 말하고 있듯이 '나는 어떤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는 글을 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은 이 책을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한국에 소개하고, 그 계기로 책을 번역한 김효진 님의 블로그에 올린 서평을 참조해주길. 그리고 일본의 페미니스트 우에노 치즈코의 짧은 서평도 볼 수 있다.

[유유]남자의 몸을 사랑하기 위해서: <느끼지 못하는 남자> 서평(1)
(*<남자는 원래 그래?>라는 한글판 제목은 일어판 <느끼지 못하는 남자>의 제목을 바꾼 것이다.)

이 글 이외에도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라는 카테고리에는 김효진 님(유유 님)의 이 책에 대한 다른 글들과 한국 사회와 문화를 바라보는 글들이 있으니 그 글들도 읽어보면 좋을 듯 하다.

이 책의 '남성 불감증'에 관한 부분은 동감할 수 있지만 제복 페티시즘과 롤리타 콤플렉스는 내겐 없는 욕망이다. 그래서 저자의 이야기를 모두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글을 보면서 계속 '나는, 나는 어땠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내 과거에 있었던 성과 관련된 사건들과 그 때 내가 느꼈던 감정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어느새 내 손은 컴퓨터 키보드에 올려져 있었고, 책을 읽다가 나의 경험에 대한 글을 쓰고, 다시 책을 읽다가 다시 나의 경험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제복 페티시즘과 롤리타 콤플렉스가 '내겐 없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대학 때 만난 페미니즘에 대한 경험과 활동 때문이다. 아마 페미니즘이 없었다면 지금 내 성욕과 여성에 대한 내 감정들이 얼마나 더 비틀어져 있었을지 짐작하기도 힘들다.

'나는 어떤가'라는 글을 현재 쓰고 있지만 그 글을 내 블로그에 올리게 될지는 모르겠다. 그 글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그래서 어떤 결론을 낼 수 있을지,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은 글을 다쓰고 나서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떤가'라는 글을 쓰다, 모리오카 교수의 책을 보다 몸이 아프고, 울었다. 몸이 왜 아팠는지는 모르겠지만 울어버린 이유는 나의 글을 읽어주겠다고, 나의 섹슈얼리티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는 페미니스트 여성 친구(들)이 있다는 점 때문이다. 나를 '페미니스트 남성'으로 생각해주는 그 친구들이 없었다면 내가 과연 나의 남성성을 나의 섹슈얼리티의 형성 과정을 바라보려고 했을지, 그리고 그에 관한 글을 써서 그녀들에게 보여주겠다는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라고 생각하면 <절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페미니스트 남성'이라고 한들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적 행동과 생각에서 자유롭게 벗어나 있을 턱이 없는데, 나를 신뢰해주는 그녀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고맙다>라는 말에서 멈추면 그건 다시 '권력을 지닌 남성'에서 멈추게 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를 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내가 좀 더 들어야 할 여성들의 말이 많은 현실에서 <고맙다>라는 말만을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몸이 아프고, 우울함에 눈물이 흘러도 '나는 어떤가'라는 글을 쓰고, 남성과 페미니즘, 남성성에 대한 고민을 끈을 놓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지금 이 글에 다 담을 수 없는 글들을 다 말하겠다.

서평들
[배은경] <남자는 원래 그래?>를 읽고
[김소희의 오마이섹스] 쉬운 남자
[일다/김윤은미] 여성학대적인 남성의 마음을 파헤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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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 남자는 원래 그래?를 읽다가,

    Tracked from merry-go-round 2007년 03월 01일 16시 31분  삭제

    모리오카 마사히로의 [남자는 원래 그래?]를 읽고 있다. 남성들의 섹슈얼리티가 어떠 어떠한 모양을 하고 있다라는 것은 너무도 뻔하게 잘 알고 있다.라고 늘 생각해왔던 것 같다. 나는 여성=피해자/남성=가해자라는 도식에 늘 익숙해져있었고, 남성들은 (당연히도 성적으로)욕망하는 존재라는 전제가 늘 자리하고 있었다. 책에서는 '남성 불감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남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념과 그것의 귀결로 남..

  2. Subject : 나의 남성성:『남자는 원래 그래?』를 읽고

    Tracked from ENCUENTRO 2007년 03월 16일 09시 46분  삭제

    *이 글은 앞으로 계속 '진행형'이 될 것이다. 다른 제목의 글을 독립적인 형식으로 쓴다고 할 지라도 나의 글은 이 글과 함께 이해될 때 온전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써 놓은 것들보다 쓰고 싶은 생각들이 많지만 생각을 정리하여 찬찬히 글을 써 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지속적인 과제로 남겨둔다. 글을 다시 읽을수록 고민의 부족함으로 민망하지만 내 고민에 지속을 위해 올려둔다. ==============나의 남성성- 『남자는 원래 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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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토요일날 봐서 좋았습니다. 영화도 그렇고, 영화를 보고 난 이야기도 그렇고, 맛난 저녁도 그렇고, 봄밤을 흉내내던 저녁 공기도 그렇고- 갈수록 우공이란 존재가 참 소중하네요.
    계획한 많은 일들,에 치이지 않고 능동적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07년 02월 26일 13시 31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저도 토요일에 봐서 좋았어요. 루냐와 만나면 나도 모르게 이야기가 술술 나와 놀라곤 해요. 제게도 루냐라는 존재가 참 소중합니다.
      안 그래도 요즘 계획한 일들에 치이지 않기 위해 시간을 쪼개가면서 쓰고 있어요. 계획한 것들을 따라 간다고 헉헉 데지 말고, 계획한 것들이 부디 나를 따라와야 할텐데...기도에 힘낼께요^^

       댓글주소  수정/삭제 2007년 02월 26일 13시 48분

일 기 2007년 01월 24일 11시 59분

각자의 사정과 페미니즘

대학을 한 번에 휴학도 없이 9학기를 다녔는데, 그 중 학생회 ‘집행부’로 활동한 시기는 5학기이다. ‘학생회’ 언저리(과대표와 워크샵 기획단, 학생회 부원)에서 했던 활동 기간까지 포함하면 4학기를 더 보태야 할지도 모른다. 결국 9학기를 학생회와 그 주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나도 이 사실을 옛 일을 생각해보다 알았다. 내가 생각해도 좀 놀라운 일이다.) 물론, 난 학생회만을 하진 않았다. 다른 것들도 <겹치기 출연>하며 하고 있었다. 학회, 소모임, 정치조직 등.

마지막 9학기 때는 학생회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애초 내 생각이었지만 활동의 지속성을 생각하다보니 졸업을 앞둔 한 학기에도 학생회를 하게 되었다. 총여학생회 활동이 그것이다. 이 활동은 그 전에 했던 <여성주의 소모임>의 연장선상에 있던 것이었다. 총여학생회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기에 한 학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한 한기였지만 그 기간의 고민은 몇 년 간의 학생회 경험보다 더 깊고 무겁기도 했다. 활동의 양도 적지 않았고.

졸업 이후 총여학생회는 4명의 집행부로 진행되었다. 그 다음 해에 총여학생회는 다시 구성되지 않았고, 비대위 체제로 두어 달 운영되다 마무리되었다. 총여학생회를 계속 하겠다는 논의가 없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결국은 각자의 사정으로 총여학생회는 <지속>이 아니라 <중단>으로 마무리되었다.

나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각자의 사정>. 난 이 말에 주목하고 있었다. 한 조직 내에서 활동을 같이하다보면 이런저런 갈등들이 발생한다. 약간의 오해로 시작된 갈등들도 있지만 갈등의 근원적인 이유는 삶-운동의 방식과 연결되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런 문제는 단기간의 논의와 고민으로 푼다는 것이 쉽지 않다. 때로는 그 고민을 미뤄두거나 <장기 과제>로 설정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활동에 대해 애정이 담긴 만큼, 딱 그 만큼 갈등을 해결하려는 ‘집착 아닌 집착’과 의지가 생겨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 여유가 생겨 다시 그 때를 돌아보면 다른 길도 보이지만 그 길을 열심히 걷고 있을 때는 옆 샛길도 지나치게 마련인가 보다. 1년간 총여학생회를 하고 그 후 비대위 활동을 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런 일은 여지없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각자의 사정>에 맞게 말이다.

지금은 그 시간과 강도가 예전에 비하면 약해지기는 했지만 한 동안 내게 이 문제는 큰 고민거리였다. 그리고 여전히 고민거리다. 졸업 후 학생회와 비대위 안에서 같이 활동을 하진 않았지만 이야기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서로에게 상처주고 상처받고 고민하는 모습이 답답하고 안타까웠으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나를 한 동안 우울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미 졸업한 전(前)활동가라는 위치가 나를 더 무력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고민이 깊어지던 나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했고, 실행했다. 총여학생회가 비대위로 활동을 정리했던 그 해 가을쯤에 난 한 친구에게 물었다. 네게 예전에 했던 여성주의 활동이 어떤 것이었는지, 네게 무엇을 남겼는지 등. 갈등들의 구체적인 상황을 정리하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도 없었고, 그것은 나의 몫도 아니었다. 그것은 각자가 스스로에게 묻고, 상대에게 묻고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갈등의 근원에는 삶-여성주의 자체에 대한 물음이 놓여져 있다고 생각했고, 이것에 관해서는 나도 고민하는 바가 있으므로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할말이 있었으니깐.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질문을 했던 그 친구는 총여학생회 이전 여성주의 소모임에서부터 있었던 좀 더 세밀한 고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말을 하는 그 친구의 목소리는 어느새 떨리고 있었고, 눈에는 눈물이 살짝 고이기도 했다. 그것을 발견했을 때 정말 진심으로 나는 ‘아차’ 싶었다. 아직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직 그-여성주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은 듯 했다. 그 친구는 ‘요즘 여성주의 책은 보지 않는다’, ‘여성주의 관련 매체들도 부러 찾아 읽지 않는다’라고 말하면 자신과 여성주의 사이에 요즘 거리가 있음을 말하기도 했다. (난, 이 때 이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내 삶의 다른 경험을 통해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삶-몸에 있는 어려운 고민과 직접 대면하지 않고 멀리 돌아가거나 순간 눈을 돌린다는 것은 당연할 뿐만 아니라 고민을 지속하는 다른 형태라는 것을.)

그 친구와의 대화로 나는 다시 내 생각의 방향을 돌려야 했다. 그 친구를 시작으로 나는 예전의 여성주의 소모임과 총여학생회를 같이 했던 사람들과 한 명씩 대화를 해보려고 했다. 어떤 방향을 설정한 대화라기 보단 이미 진작 했어야 하는 대화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모여 그것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한 명씩 시간을 두고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좀 더 집단적인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 명씩 만나 (현재진행형인) 과거의 이야기들을 하기 보단 (현재진행형인) 미래의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즉, 다들 자주 모이거나 논의를 길게 하지 않아도 같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고자 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작은 도움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것을 여성주의 소모임과 총여학생회를 했고, 그 활동을 <가입>형태는 아니지만 <지지>형태로 같이했던 이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여성주의 소모임과 총여학생회 이후 시간이 많이 지나 <여성주의>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고민을 묶어내기에는 서로 공유되지 못한 삶의 조건과 그 속에서의 고민들과 욕구들이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난, 다시 방향 선회를 해야 하는 시점과 지점에 서있는 듯 하다.

나의 이런 고민들은 조금씩 내비친 친구들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내 계획까지 모두 말한 친구들은 없다. 나도 아직 모색 중이었기에. 하지만 얼마 전 친구-나비가 “쫌 얘기 좀 해”라고 했을 때, 이젠 조금씩 얘기를 해도 되겠구나 싶었다. 현재 구상하는 아이디어가 있기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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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 아이디어라는것이 무엇인지 함께 얘기해보고 싶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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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1월 24일 17시 27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당신은 이미 알고 있는 건데...후* *장. 기억나지? ㅋㅋ
      이와 비슷한 방식을 좀 더 생각을 해보려고. 아직은 아이디어!

       댓글주소  수정/삭제 2007년 01월 24일 17시 54분

사용자 삽입 이미지
‘미시사’, 역사는 삶의 구성이다
‘거시사’는 역사를 중요한 특징들을 가지고 묘사한다. ‘서유럽 중세’를 상상할 때 떠오르는 대다수의 것이 거시사적 시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원-농노 관계, 왕과 영주의 계약 관계, 삼포제 등등. 하지만 이런 특징만으로 그 시대인의 삶의 방식과 문화까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혹자는 ‘역사 서술은 일반적일 수밖에 없는 만큼 사람의 미세한 삶의 방식까지 아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것 아니냐. 한 사건을 통해 그 당시의 사회를 보려는 것은 일반적인 역사를 한 사건으로 환원하려는 행위이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미시사’적 역사 서술은 그 당시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서술해주고 이로 인해 당시의 생활사를 이해할 수 있는 상상력의 기초를 제공해준다. ‘미시사’는 ‘역사’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불안정하고 다양한 삶의 형식이 가려지는 것을 막아주고, ‘역사’는 (인간의) 삶의 구성임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이러한 특징은『마르탱 게르의 귀향』에서 잘 드러나는데, 프랑스 각 지방의 재산 제도의 차이, 아르노와 피에르 게르의 갈등에서 드러나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충돌 등과 같은 문화적인 갈등 등이 바로 그것이다.

『마르탱 게르의 귀향』, ‘여성’을 말하다.
『마르탱 게르의 귀향』에서 베르트랑드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런 만큼 그녀를 둘러 싼 생활 조건 및 그의 심리적 고민들도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런 묘사는 ‘중세 서유럽에서 여성은 남성의 재산으로 속한다.’라는 서술의 단순함을 견제하며 그 당시 여성의 삶을 풍부하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그녀의 다양한 고민들을 짐작할 수 있다. 91~92쪽에서 베르트랑드의 고민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창안된 결혼”(70쪽)과 법정 공방에서는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구성하려는 의지, 주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의지를 너무 강조하여 주지주의적인 역사 해석을 하려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창안된 결혼”은 베르트랑드의 주체적인 의지가 있기도 했지만 프로테스탄트라는 당시의 새로운 기류에 영향을 받은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의 행위가 주목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밖에도 이 책의 특이한 장점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이다. “그러나 사진도 없고 초상화도 드물고, 테이프 리코더도, 지문 날인도, 신분증도, 출생 증명서도 없고 그나마 교구 기록이 있다 해도 여전히 일정치 않았던 시대에 어떻게 개인의 정체를 의심의 여지 없이 확고히 밝힐 수 있겠는가?”.(94쪽) 이는 “16세기 사회에서 진정한 정체성이란 무엇인가를 결정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20세기를 살면서 역사가가 진실을 추구하는 것 또한 좀처럼 쉽지 않은 일”(한수덕,「미시사의 상상력, 그리고 모호함」, http://www.libro.co.kr/books/book_detai ··· 38033%29 임을 알고 있는 저자 데이비스가 끈임없이 자신의 태도와 역사적 사료를 의심하려는 태도 때문이다. 그는 역사 이해에 있어서 열린 태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비판
하지만 이 책은 'Her story'일 뿐이라는 점에서 젠더(Gender)적 시선을 견지하는 페미니즘으로부터 비판 받을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있다. 조금 거칠게 이 사건을 재구성해보면, 사건의 법정에 서게 된 것은 아르노와 피에르 게르의 ‘재산권’ 다툼 때문이었고 그 속에서 베르트랑드는 명목상의 신고인일 뿐 재판의 중요한 ‘참고인’, ‘증인’ 이상은 아닌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 가부장적 사회 질서의 한 반영이지 않을까라는 지적은 가능할 것이다. 물론, 이런 과정 속에서도 우리는 베르트랑드의 당당한 태도를 접할 수 있으며 이 점을 놓쳐서는 곤란하다. 이점은 이 책의 중요한 미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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