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앞으로 계속 '진행형'이 될 것이다. 다른 제목의 글을 독립적인 형식으로 쓴다고 할 지라도 나의 글은 이 글과 함께 이해될 때 온전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써 놓은 것들보다 쓰고 싶은 생각들이 많지만 생각을 정리하여 찬찬히 글을 써 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지속적인 과제로 남겨둔다. 글을 다시 읽을수록 고민의 부족함으로 민망하지만 내 고민에 지속을 위해 올려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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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남성성
- 『남자는 원래 그래?』를 읽고
『남자는 원래 그래?』를 읽고 나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글을 쓰다 문득 생각하게 되었다. 여성은 남성의 섹슈얼리티가 궁금할까? 만일 궁금하다면 뭐가 궁금할까? 여성은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알아야 하는가? 이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남성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궁금해 해야 하는가
남성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궁금해 하는 것과 여성이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궁금해 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여남 상호 간의 궁금한 점이 다양할 수 있지만 나는 남성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남성 자신의 성욕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 대상화시키지 않고 궁금해 한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성찰적 행위라고 생각한다.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궁금한 남성은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남성은 자신의 욕구와 차이점들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 차이를 어떻게 남성이 생각할지는 다시 차이날 수밖에 없지만 일단 ‘차이가 있다’는 것 자체를 알았다는 것은 넓은 의미의 성찰이거나 성찰의 시작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남성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궁금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성의 여성 섹슈얼리티의 대한 의문이 가부장제에 대한 질문 혹은 의문의 시작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여성이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궁금해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사회 문화 역사적으로 주로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왜곡 억압되는 상황에서 여성은 스스로의 섹슈얼리티를 이해하고 그것을 가부장제로부터 해방시키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을 소요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녀들이 ‘억압자’의 섹슈얼리티를 이해할 틈이 있을까? 여성이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궁금해 해야 하는가? 나는 (남성과는 다르게) 여성이 남성의 섹슈얼티리를 궁금해 해야 하는 당위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여성은 가부장제를 통해 끊임없이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이해하고 일방적으로 수용할 것을 강요받아 왔다고 생각한다. 여성에게 남성의 섹슈얼리티는 선택하여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강요이고 그래서 억압이다. 그렇기에 여성에게 남성의 섹슈얼리티는 대상화되어 해체되어야 하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궁금해 하지 않을까. 모든 여성들이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여성이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궁금해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남성이 친밀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일 때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는 어떤 사람을 좋아할까?’, ‘그는 어떤 섹스 체위를 좋아할까?’, ‘그는 남성 친구들과 무슨 대화를 할까?’, ‘그는 가족들을 어떻게 대할까?’ 등등. 여성들이 궁금해 하는 것이 다양할 수는 있지만 그 중 일정 부분은 연인의 섹슈얼리티에 맞춰져 있을 것이다.
만일 내가 이와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나는 이런 저런 스타일의 사람을 좋아하고, 이런 저런 섹스 체위에 흥분하며, 내 남성 친구들과는 이런 저런 짓을 하고, ... 기타 울라불라’ 하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대답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이런 저런 사람이 좋고, 이런 저런 체위가 좋고, 왜 남성 친구들과 이런 저런 짓을, ... 기타 왜 울라불라야’ 라고 물어본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쉬운 답은 ‘그냥 나는 그게 좋아’이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계속 궁금해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실제로 나는 이런 질문들을 받아 본적이 있다. 다른 질문들도 대답하기 어려웠지만 특히 어려웠던 것은 ‘왜 당신은 그런 체위를 좋아 해’라는 질문이었다. 물론 그냥 그렇게 하면 기분이 좋아라고 말할 수 있고, 그게 답일 수 있다. 실제로 나도 그랬다. 하지만 만일 그 체위가 제복 페티쉬나 롤리타 콤플렉스처럼 ‘여성을 대상화한 폭력성이 잠재된’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에게 이것은 ‘그냥 좋아’라고 끝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페미니즘 활동과 공부를 통해 생각하게 된 성별(젠더) 차별, 가부장성, 폭력적인 남성성 등이 문제이며 내 안에 잠재된 그것들에서 해방되고 그것을 극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글을 썼지만 솔직히 여성들이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궁금해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여성들이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궁금해 하지 않는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페미니즘을 만나다
2003년 겨울에 나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여성주의 세미나를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여성주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는 지적 호기심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세미나를 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세미나 구성원은 나를 제외하고 모두 여성이었고, 그런 만큼 세미나에서는 여성들의 경험들이 주로 이야기되었다. 여성들의 경험들 중 상당수는 일상의 폭력과 성 차별, 그로 인한 두려운 경험 및 기억들과 관련되어 있었다. 어느 날 나는 내 방의 창문이 열려 있는 상태에서 옷을 갈아 있었다. 창문이 열려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옷을 갈아입지 못한다거나 혹은 창문을 닫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옷을 다 갈아입었는데 갑자기 세미나 때 ‘창문을 열고 옷을 갈아입기가 무섭다. 누군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다’라며 두려움을 말했던 한 여성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이 경험은 내게 충격이었다. 내겐 ‘공포’가 아닌 평범한 일상이 다른 누군가에겐, 여성에겐 ‘공포’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런 생각을 한 번 하게 되자 나의 많은 일상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고, 그런 고민 속에서 나는 페미니즘의 다양한 문제의식을 이해하고 고민하게 되었다.
처음에 나는 이런 과정들이 힘들지는 않았다. 내게 이것은 맑스주의나 ‘사회 변혁적인 사상을 통해 사회의 다양한 모순을 이해하는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고민을 한다는 것이 힘들어졌다. 특히 세미나가 그랬다. 세미나에서 여성들에게 들은 ‘피해’ 경험 중 어떤 것들은 내겐 ‘가해’의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나와 함께 세미나를 하는 그 여성을 가해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다른 누군가의 여성에게는 ‘가해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 세미나가 무척 힘들어졌던 것이다. 우선은 내가 ‘가해자’, ‘폭력 행사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고 그래서 더욱 힘들었다. 나는 나로 인해 상처 받았을 그녀들에게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하는지, 사과를 하면 해결될 수 있는 것인지 등을 생각했지만 뚜렷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고민이다. 페미니즘을 처음 접했을 때의 고민들에 아직까지 뚜렷한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점이 나를 우울하게 하거나 힘들게 한다. 이런 상황은 조금 다른 측면에서 나를 힘들게 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인지하지 못하고 한 ‘폭력’ 때문이었다. ‘폭력’이라고 인지하지 못하고 저질렀던 그 많은 폭력들. 나는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왜 그랬을까’라는 자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성주의 책들을 열심히 읽고, 다양한 여성주의 매체, 글도 성실히 보려고 했다. 그래서 다양한 해답들, 관점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설명들을 모두 쉽게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지 않은 부분에 동의를 할 수 있었으며, 그것들은 내가 성찰하고 반성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다. 여성주의에 관한 고민들이 지속될수록 뭔가 빠진 듯 했다. 그래서 답답한 경우가 많았으며, 계속 제자리를 맴도는 고민들은 점점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쌓여가는 고민들 속에서 나의 감정들과 생각들은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나의 ‘성적 욕망’에 대한 내 감정과 생각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나는 나의 성욕이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며칠 밤 반복되는 허탈한 자위와 ‘섹시한 여성’ 혹은 성적 표현이 강한 영화를 보며 자위를 하는 내 자신이 한심할 뿐만 아니라 ‘생각은 페미니즘, 몸은 남성 중심적으로 행동’하는 비열한 사람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나는 자위가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것조차도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보다 더 문제였던 것은 연인과의 섹스 문제였다. 이 문제는 현재 상세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정리되지 못했지만 이것은 내겐 무척 복잡한 문제로 남겨져 있다.
- 보충: 여성주의 세미나에 대한 나의 ‘오해’
어쩌면 여성주의 세미나에서 여성이 말한 성 차별과 성폭력에 대한 경험을 말하는 것은 두려움의 표현임과 동시에 스스로를 치유하는 과정이기도 했을 것 같다. 여성주의에 관한 책을 읽는다거나 다른 여성과 동일한 경험에 대해 말하고 공유한다는 것은 잊었던 두려움의 좋지 않은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여성주의 책을 통해) 상처를 의미화하고 말하는 언어를 만나고, (대화를 통해) 따뜻한 감정을 받는 치유의 시간, 경험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처음 한 여성주의 소모임 세미나에서 받은 느낌은 여성들의 두려움과 공포였다. 그때, 나는 그 시간이 치유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어쩌면 그 때 난 다시 한 번 여성들을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두려움만을 느끼는 주체'로 말이다. 지금 이렇게 그 시간들이 두려움만을 말하는 시간이 아니었다고 스스로 새롭게 자각한 사실을 쓰고 있지만 여성을 특정한 주체, 특히 '고통받은 주체'라고 상정하고 여성과의 관계와 대화를 유지하는 일이 내게 다른 상황에서 반복되는 (그래서 바꾸고 싶지만 어려운) ‘오래된 습관’ 같은 것이다.
『남자는 원래 그래?』
이런 와중에 나는 서점에서 『남자는 원래 그래?』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목차와 추천사를 보고 이 책을 구입하는 데는 몇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나의 욕망들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후부터는 이 책을 읽으며 든 생각들을 적은 것으로, 나의 성적 욕망과 관련되어 있다. 나는 이후 글에서 최대한 나의 섹슈얼리티에 거리를 두고 설명하려 애썼지만 그것이 얼마나 잘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다른 남성의 몸이 더럽다고 생각한다
마사히로는 스스로의 몸을 부정하게 된 출발점이 ‘몽정’을 통해 정액이 몸에 묻었을 때라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남성 일반의 몸이 더럽다는 것이 아니라 남자인 ‘자신의 몸’이 더럽다는 것이다. (170쪽)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액을 내뿜은 성기의 주변이다. 왜냐하면 섹스를 하든 자위를 하든 사정한 다음에는 반드시 성기에 정액이 묻기 때문이다. 그러면 정액을 닦아내지 않으며 안 된다. 바로 이때 나는 내 몸이 가장 더럽다고 느낀다. (171쪽)
나는 내 몸이 더럽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자위 후 내 체모에 붙은 정액을 보고서도, 몽정 후 내 팬티에 묻은 정액을 보고서도 더럽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하지만 내 몸이 싫다고 생각한 적은 있다. 힘이 없는 남성, 싸움을 못하는 남성이라고 그래서 나를 ‘2등 남성’이라고 생각할 때는 스스로가 싫고, 약한 내 몸이 싫었다. 하지만 나는 운동을 아예 못하는 편이 아니라서 내 몸을 부정적으로만 인식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나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다른 남성의 몸을 더럽다고 생각하고, 다른 남성이 나의 몸을 만지거나 내가 다른 남성의 몸과 접촉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한 방에서 남자 친구와 잠을 자게 된 적이 있었다. 술 마시고 누웠던 우리들은 술기운에 잠이 오지 않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그 친구가 내게 물었다. “손잡아도 되요” 난 순간 당황했지만 그 당황스러운 감정을 곱씹어 볼 새도 없이 이미 내 몸은 움츠러들었고, 내 입은 ‘안 돼’를 외치고 있었다. 그때의 내 감정은 지금도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는데, 나는 남성과 늦은 밤, 방 안에서 손을 잡는다는 것이 몹시 싫었다. 근데 왜 싫은지는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그 후 내 감정을 더 생각을 해보았지만 명쾌하게 정리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몇 가지 더 스스로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있다.
우선 나는 다른 남성과 따뜻한 친밀한 신체 접촉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어렸을 적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따뜻하게 안아준 기억나는 경험이 전혀 없는데, 혹시 이것과 무슨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특히 아버지와의 친밀하고 따뜻한 신체 접촉은 전혀 없다. 또 하나 알게 된 것은 다른 남성의 몸에 대한 두려움 저변에는 ‘더럽다’는 감정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지 약하게 잡고 있는지는 좀 더 고민해봐야겠지만 다른 남성의 몸을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은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안 좋다고만 생각하는 ‘소심하고 겁 많은 사람’과 비슷한 것 같다.
최근 생각하게 된 것은 이런 나의 반응과 호모포비아와의 관련성이다. 남성이 호모포비아가 되는 배경에는 남성의 지배적인 위치가 흔들리는 것을 ‘공포’스러워 하기 때문일 수 있다. 이밖에 더 고민할 것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여기에 다른 남성의 몸에 대한 거부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하고 있다. 나는 이런 다른 남성에 대한 거부감과 경쟁하듯이 자신의 근육을 단련하는 욕구와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남성의 몸에 대한 불인정과 자신의 몸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애정이 그 저변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몸이 자본을 위한 자원이 된다는 점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사정=오르가즘은 아니다. 하지만...
모리오카 교수의 말처럼 나도 사정할 때 ‘성감 곡선의 정점’이라는 오르가즘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듯 자위 이후에 찾아오는 뭔가 모를 허탈감은 나도 가지고 있다. 나 같은 경우에 패배감이라고 까지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자위 이후 ‘자위로 인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나의 자위를 통한 ‘사정’은 이성과 성기결합 섹스를 통해 사정에 이른 적이 없는 내겐 모리오카 교수와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나는 자위 경험을 통해 사정이 오르가즘은 아니란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난 하나의 ‘집착적 환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이성과의 성기결합 섹스로 인한 사정은 좀 더 강한 쾌감을 내게 줄 것 같다는 집착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여성 친구들과 대화와 그리고 『아주 작은 차이』를 통해 성기결합을 통한 사정은 남성만의 쾌락이 될 것이란 점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리고 성기결합 섹스는 아니지만 다른 스킨쉽 형태의 섹스를 통해 상호교감이 없는 스킨쉽과 섹스는 내게 강도가 낮은 쾌감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성기결합을 통한 사정=강한 쾌감’이란 공식이 ‘환상’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집착하는 모순의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다.
다정함이 뭔지 모르는 남자
모리오카 교수는 ‘느끼지 못하는 남자’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로 자신이 불감증임을 인정하고 섹스에서 ‘엄청난’ 쾌락만을 추구하지 말고 ‘불감증이지만 다정해지는 길’을 찾으라고 권한다. 내 스스로 생각해봐도 섹스할 때 쾌락만큼이나 (어쩔 때는 쾌락보다 더) 좋은 것이 다정한 대화나 애정이 담긴 스킨쉽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위를 할 때에는 다정한 대화나 스킨쉽을 상상하고 하는 경우는 없다. 사정을 통한 쾌감만이 목적이 되는 경우가 많다. 모리오카 교수가 제안하는 ‘다정함 찾기’는 글을 쓰는 지금이라도 해볼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잠자기 전 이불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고 쓰다듬어 준다면 어떨까 하고 말이다. 이것이 섹스 파트너가 없는 사람을 더욱더 외롭게 할지, 아니면 자위 이상의 만족감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자체가 ‘사정 중심의 허탈한 자위’에서 벗어난 행위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을 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내가 조용히 혼자서 집 안에 앉아 있는 것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공사다망하거나 다양한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쓰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외롭다’라는 항목이 추가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타인의 다정함을 욕망한다. 나는 타인이 나에 대해서 계속 관심 갖고 계속 질문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타인들에게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관심을 표하는지도 모른다. 받지 못하는 다정함을 내가 남에게 줌으로서 푼다는 이상한 상태에 처해있는 것인가.
하지만 나는 따뜻한 마음을 받고 있을 때도 누군가가 나에게 애정을 쏟고 있다고 자각하지 못했다. 따뜻함을 받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걸까.
내가 생각하는 다정함, 따뜻함이란 무엇일까. 어쩌면 ‘나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이 나에 대해 집착해주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섹슈얼리티를 구성한 그 밖의 것들 그리고 젠더를 넘는 구체적인 섹슈얼리티
1. 지식에 대한 굴복과 지식 권력욕
2. 페미니즘을 기반으로 한 남성학
3. 남성성과 군대, 그리고 병역거부
4.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 아버지 부재 시기와 그 시기의 어머니
위의 주제들도 지금까지 써진 것들만큼이나 나의 섹슈얼리티 구성에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것들에 대해 쓰는 것은 좀 더 뒤로 미뤄두고 싶다. 이 주제들과 관련된 글을 쓰기 위한 시간도 시간이지만 아직 고민해야 할 세부적인 부분들이 더욱 많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몇 가지 이야기를 쓰면서 든 생각은 남성이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이 스스로의 남성성과 가부장제에 대한 성찰의 시작일 수 있다면, 남성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질문은 가부장제와 직면하는 일이란 점이다. 결국 남성성이 가부장성에서 해방될 수 있으려면(남성성이 가부장성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는 좀 더 고민되어야 할 주제이다.) 남성 스스로가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구체적인 질문을 하고 그것을 넘어서려 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성의 섹슈얼리티도 무척 다양하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위에서 내가 모리오카 교수와 나의 경우를 비교한 것들만 봐도 얼마나 서로 다른지를 알 수 있다(이 점은 모리오카 교수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경우가 남성 일반적인 사례는 아니라는 점을 계속 환기시킨다.) 조금 성급하지만 나는 구체적인 섹슈얼리티에 대한 질문이 남성성과 젠더라는 것을 변혁적으로 해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이 주제는 추후 좀 더 풍부화하고 싶은 영역이다.) 여남의 구체적인 섹슈얼리티 경험들을 듣다보면 그것을 여성적이다 남성적이다로 묶는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젠더가 무용하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니다. 기업, 군대, 학교 등등의 수없이 많은 집단들 속에서 젠더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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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언어는 정치적.
바쁜 건 좀 마무리가 되었나요(어랏, 이런 질문을 어느새 제가 하고 있군요)
바쁜 건 계속 진행형이에요. 제가 바쁘다는 건 포스팅 수와 댓글에 대한 늦은 답변이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요. 머리속에 저장해 둔 포스팅들은 모두 사라지고 있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