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1년 여름. 이렇게 적고 보니 정말 멀게 느껴지는 때이다. 그 때 우리 집에는 물이 차 있었다. 여름 장마와 한 건설회사가 수로를 막아 (생각해보니) 다소 어이없는 수해를 입었던 것이다. 수해보다 연인과의 헤어짐이 더 힘들었던 나는 나름대로 수해를 즐기는 상황이 되었다. 옥탑방에서 자는 것도 새로웠고, 시멘트 바닥에 찬 물을 말리기 위해 선풍기와 보일러를 틀어 놓은 방에서 황석영의 『손님』을 읽는 재미도 괜찮았다. 이 때가 20대 이후 가장 한가한 때였고, 그래서 그만큼 내겐 쉽지 않은 때이기도 했다. 뭔가를 해야 살아있음을 느끼는 내게 집-알바를 오가는 상황은 무료하기만 했다.
종로3가의 한 팬시점에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일을 하고, 집에 오고, 방학 동안에 다 읽기로 다짐한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를 정독하고. 이런 단조로운 생활이 반복되는 여름. 이 때 가장 재미있었던 경험은 서울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애니를 보는 것이었다. 그 후로 한 번도 이 행사에 가서 애니를 보지 못했기에 그 때의 기억은 생생하고 소중하게 남아 있다. 무턱대고 개막식 상영관(정동극장)에 찾아갔다 입석을 끊어서 개막작 <메트로폴리스>와 감독 린 타로를 보게 되었고, 그 다음날에도 무작정 심야상영을 보겠다고 찾아갔다 입석을 끊어 새벽까지 애니를 보았다. 물론 두 번 다 요행으로 자리에 앉아서 영화를 보았다. 개막식에는 빈자리가 조금 있어서, 심야상영에서는 한 애니평론가 혹은 기자가 영화가 시작하자 짐을 싸서 가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내가 (기사로만) ‘아는’ 기자였고, 짐 싸는 폼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아서 그 자리를 내가 차고 앉았다. 다행이도 그는 오지 않았다. 상영작은 <원령공주>, <라스트 뱀파이어>, 그리고 기억이 안 나는 미국 풍자 애니.
정은임의 라디오 방송에서 애니메이션 음악을 소개하는 것을 듣다 옛 기억에 빠졌다. 그 덕에 <메트로폴리스>를 기회가 생기면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트로폴리스>는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이다. 린 타로 감독은 애니 <X>의 극장판 감독이며 화려한 영상을 구사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영화감독 서극과 비슷하게 생겼던 것 같다. 간혹 나는 <메트로폴리스>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 “영화 <A.I.>와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라고 소개하곤 한다. ‘로봇이 “Who am I?"라는 질문을 갖게 되었을 때, 그것은 어떻게 풀려야 할까’라는 질문이 이 두 영화를 관통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을 푸는 서사 구조와 표현은 많이 다르다. (이것을 다 쓸 여유는 없으니 패스^^)

<메트로폴리스>에서 내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I can't stop loving you 가 흐르면서 도시가 무너지는 장면이다. 이 곡만 들으면 노래가 슬픈데, 애니에서는 그렇게 슬프지가 않다. ‘도시가 무너지는 구나’ 정도이지 ‘어쩌면 좋아’는 아니다. 보면 그대로 수용하게 된다. ‘무너지네. 어쩔 수 없지 뭐. 다시 잘 살아 보자고. 잘 되겠지 뭐.’ 이런 식으로. 사실 무너지는 장면이 예쁘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 드는 생각은, 진정한 해체는 구축일 수밖에 없는데 감독은 도시의 무너짐(해체)이 새로운 것을 구축하는 것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영화의 끝, 도시가 무너지고 난 다음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각자가 다를 것이다. 같이 볼 사람과 이 이야기를 하게 되면 재미있을 것 같다. 그래서 약간 흥분된다. (근데, 혼자 보면 어쩌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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