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프레시안> 'books' 섹션에 '편집자, 내 책을 말하다'( http://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00826183907 )에 실린 안또니오 네그리의 <예술과 다중>에 관한 서평입니다. 출소 후 처음 쓴 글이죠. ^^

다중의 시대, 우리 모두는 예술가!

오정민 | 갈무리 편집자


<제국>(2000), <다중>(2004), <공통체>(Commonwealth, 2009)를 출간하여 찬사, 비판, 논쟁으로 전 지구를 뜨겁게 달군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1933~)가 쓴 예술에 관한 책을 접하며 사실 나는 기뻤다.

네그리에게는 "혁명적 투사", "당대 최고의 지성"이란 수식 어구가 함께 따라 다닌다. 이런 수식 어구는 전 지구적 사회운동의 중요한 논쟁과 행동에서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자신의 정열적 지성을 표현하며 운동과 긴밀히 호흡했기에 붙여진 것이다. 이런 그가 예술이란 단일한 주제로 <예술과 다중>(심세광 옮김, 갈무리 펴냄)을 썼다고 하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 책의 형식도 매력적이었다. 가상 인물인 지안마르코, 카를로, 지오르지오 등과 실존 인물인 프랑스어판 번역자 마리 막들렌느, 스페인어판 번역자 라울 산체스 등 9명에게 보내는 서신의 형식를 취한 이 책은 그 형식에서도 특이한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다. 서신이란 형식은 무게감 있고 진중한 그의 창의적인 사유에 조금 더 쉽고 부담 없이 몰입하게 해주는 훌륭한 장치이다.

편집자이면서 한 명의 독자이기도 한 나에게 이것은 큰 기쁨이었다. 그리고 다른 독자들에게도 기쁨이 될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옮긴이와 나는 이 기쁨이 더욱 증대되길 바라며 이 책에 소개된 낯선 개념과 이름을 설명하는 주석과 예술 작품을 찾아 추가했다. 이것은 원서에 없는 작업이라 다소 고되기도 했지만 책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하나의 예술적 행위라 여기며 작업했다.

이 책의 이름은 "예술과 다중"이다. 곧 이 책의 주요 주제는 예술과 다중에 관한 것들이고, 9편의 서신 하나하나에는 그 사유의 핵심이 담겨져 있다. 네그리는 각각의 서신에서 추상, 포스트모던, 숭고, 집단 노동, 아름다움, 구축, 사건, 신체, 삶정치 등의 테마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테마 속에서 이탈리아의 시인 자코모 레오파르디, 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 무용가 피나 바우슈, 시인 샤를 보들레르, 작가 오스카 와일드, 화가 에두아르 마네, 구스타브 쿠르베 등을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와 그들의 시대를 가로지르고, 시와 소설, 연극, 그림, 조형 예술, 영화, 무용 등의 장르를 넘나들며 현대 예술사를 창조적으로 횡단한다. 네그리의 이런 폭넓고 다양한 사유는 독자들을 신비한 체험 속으로 인도하며 예술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조명하게 도와준다.

9편의 서신에 담긴 주제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일반적인 질문을 넘어 '우리 시대의 예술이란 무엇인가' 혹은 '지금 여기에서 예술이란 무엇이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며 그에 대한 심도 있는 대답이기도 하다. 이것은 오늘날 예술과 예술을 통한 활동에 진지하게 물음을 던지는 이들에게는 어느 하나 놓칠 수도 피해갈 수도 없는 것들이다.

네그리는 <예술과 다중>에서 예술이 무엇이며 예술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 네그리는 1970년대 이래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전 지구로 확산되어 우리들의 삶 전체를 포획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시대에 예술 역시 상품세계의 일부가 되었다고 진단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자본주의에 찌든 공허하고 헐벗은 주체들과 그들이 만든 예술상품 시장들뿐일까. 우리가 가는 길은 공허의 길일뿐인가. 역사는 이렇게 끝나는가. 네그리는 단호히 말한다.

"공허는 한계 따위가 아니라 하나의 통로이다. (…) 예술 행위를 시장으로 환원하는 저 일상적인 모욕을 피하는 것은 가능하다."

"예술 작품의 특이성은 매개도 상호교환 가능성도 아니며 오히려 절대적인 것을 재생산할 수 있는 가능성[인데] (…) 사적인 방법으로 예술을 재영유화하는 것, 예술 작품을 가격으로 환원하는 것은 예술을 파괴하는 것이지요. (…) 예술은, 가격으로 환원된 단일성에 여러 특이성으로 이루어진 다중을 대립시키기 때문에 반시장인 것입니다. 시장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혁명적 비판은 여러 가지 특이성으로 이루어진 다중이 예술을 향유하기 위한 하나의 장을 구축합니다."('지오르지오에게 보내는 편지―숭고에 대하여', 85~87쪽)

즉, 우리는 시장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시장의 가격환원성에 반대하며 반시장적인 특이한 다중예술론을 정립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중(Multitude)이란 어떤 존재인가. 한국 사회는 다중의 폭발적인 힘을 2008년 촛불 집회를 통해 생생하게 경험했다. 우리는 '경찰군대'의 물대포에 맞서 싸우다 물처럼 유연하게 흩어졌다 다시 모이고, 매일 새로운 행진 경로를 구축하며 다양한 구호를 외치고 퍼포먼스를 하는 그들을 다중이라 불렀다.

이처럼 민중, 시민, 대중과 구분되는 이들은 공통의 기반을 갖고 있으면서도 개개인이 특이한 주체성이다. 노동이 날이 갈수록 언어화-정동(affect)화-정보화되어 비물질화되고 네트워크화되는 오늘날 다중은 집단적으로 재/생산하는 힘이다. 그리고 네그리는 아름다움이 다중의 집단노동을 통해 생산된다고 말한다.

"아름다움이란, 새로운 존재의 아름다움이고 집단적 노동을 통해서 구축되는 초과, 노동의 창조력에 의해 생산되는 초과인 것입니다. 아름다움의 사건을 결정하는 이 생산, 즉 아름다움의 생산은 권력으로부터 해방된 노동입니다." ('마씨모에게 보내는 편지―아름다움에 대하여', 113쪽)

이렇게 다중의 집단 노동의 창조력이 생산하는 초과가 아름다움일 때, 다중은 예술과 분리된 그 무엇일 수 없다. 다중의 모든 노동 속에는 항상 예술이 존재한다. 이것은 놀라운 선언이다. 우리가 모두가 예술가라는 선언이며 우리의 존재 자체가 예술인 시대에 살고 있다는 선언인 것이다.

나는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열정적인 다중예술 선언을 마음껏 즐기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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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7 09:17 2010/09/07 09:17

내 삶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었다. … 그런데 공허를 움켜쥐었던 내 손 안에 타인의 손가락으로부터 몇 마디의 말이 흘러들었다. 내 심장이 삶의 기쁨으로 고동쳤다. 생각의 낮이 밝아오면서 밤이 사라졌고, 지식을 향한 열정과 더불어 사랑과 기쁨과 희망이 찾아왔다. … 나는 평생 처음 지적으로 사용하는 말을 통해 살아가고, 생각하고, 희망하는 법을 배웠다. 어둠이 나를 다시 가둘 수는 없었다.(34~45쪽) 헬렌 켈러(왼쪽)와 설리번 선생.

-- <행복해지는 가장 간단한 방법-헬렌 켈러의 희망과 긍정의 인생예찬>

원문은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4918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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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4 23:19 2009/04/14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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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글은 불편하다
from 리 뷰/책 2009/02/10 23:02

서경식. 그의 글은 불편하다. 정돈된 단문으로 이루어진 그의 문장은 빛과 희망을 이야기할 때조차도 어둠과 절망이 느껴진다. 불편하지만 한 번 읽으면 좀처럼 손에서 놓기 힘들다고 조심스럽게 고백해야 겠다. 그래서 나는 그의 책 두 권을 읽었다. 『디아스포라 기행』,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두 번째 책을 읽고나서 계속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했지만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그의 이름으로 새롭게 출간되는 책 목록만을 외워두고 있었다. 철 지난 계간지를 찾으러 헌책방을 돌아다니다 늦은 저녁 처음 간 헌책방에서 그의 책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를 구입했다. 한국어판 서문만을 읽어본다. 그의 문장은 여전하다. 서문을 읽다 문득 생각한다. 아마 그는 자신의 책을 읽고 좋았다는 말보다 불편했다는 말에 더 호기심을 보일 것 같다고.

얼마 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다가 자신의 일상을 관찰하고 그 속에서 피어난 사유를 기록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한 적이 있다. 그 기록은 자신을 지키는 일일까. 아님 새로운 만남을 여는 일일까. 생존을 위한 기록일까.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는 기록이다. 하지만 쁘리모 레비에 관한 기록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은 그 동안 내 사유 활동의 핵심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쁘리모 레비라는 드문 인물과 나의 대화로 이뤄진 책이라도 할 수 있다."(8쪽) 이 책은 서경식에 관한 기록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것은 '평전'이자 '자서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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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0 23:02 2009/02/10 23:02

가야트리 스피박을 통해서 주로 접했던 서발턴 연구의 대표적인 학자 라하지트 구하(Ranajit Guha)의 책이 김택현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되어, 출판사의 서평을 옮겨온다. 서평을 읽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된다.

서발턴과 봉기 
라나지트 구하 (지은이), 김택현 (옮긴이) | 박종철출판사


‘서발턴 연구’의 대표작 번역되다!

서발턴(subaltern). 하층민이나 군대 내에서 서열이 낮은 자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이다. 그런데 영국의 지배를 받는 식민 인도에서의 민중들의 저항운동을 ‘서발턴 연구’라는 이름으로 수행해 온 집단이 있었다. 그 대표자는 라나지트 구하(Ranajit Guha)이다. 그 구하의 ‘서발턴 연구’의 대표작인 Elementary Aspects of Peasant Insurgency in Colonial India가 『서발턴과 봉기』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옮긴이는 한국에서 서발턴 연구를 대표하는 김택현 교수이다.

저자의 이력에서 알 수 있듯이, “서발턴 연구” 집단은 기본적으로 맑스주의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정통’을 자처하는 맑스주의자들이 봉기를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치, 조직, 의식 등의 기준에 견주는 것에 서발턴 연구 집단은 반대한다. 예를 들면, 대표적인 맑스주의 역사가인 홉스봄 역시 구하에게는 비판의 대상이다.

저자 구하는 식민 시대 인도 농민들의 봉기를 묘사함에 있어서, ‘봉기’라는 말 대신에 ‘딩’, ‘비드로하’, ‘울굴란’, ‘훌’, ‘휘뚜리’ 등을 사용한다. 모두 인도 여러 부족에서 ‘봉기’를 가리키는 말들이다. 이 뿐만이 아니라 지주, 고리대금업자, 경찰서장 등을 가리키는 말들도 당시 인도 여러 부족의 언어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그것이 “농촌 대중의 그 행위를 특징짓는 의식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구하가 보기에, 영국의 지배를 받던 인도에서 벌어진 농민 봉기는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그리고 이 책의 원제 “식민 인도에서의 농민 봉기의 기초적 측면들”이 말하듯, 구하는 그 여러 봉기들의 기초적 측면들을 고찰한다. 그리고 각 장의 제목에 나타나 있듯, 부정, 모호성, 양상, 연대, 전파, 영토성 등에서 그 기초적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

농민들의 저항은 기존의 것에 대한 ‘부정’에서 시작된다. 명확한 방향을 지니지 않고 시작되는 ‘부정’은 그저 전복일 수도 있고, 뒤죽박죽으로 만들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서발턴에게는 ‘부정’ 자체가 중요하다. 그 부정은 지배층과 자신들 사이의 차이 또는 거리의 부정이다.

‘모호성’ 역시 기초적 측면의 하나이다. 도대체 산적질과 봉기 사이의 구분이 모호하다. 어디까지가 개인의 범죄인지 어디부터 사회적 의미를 갖는 봉기인지 경계가 애매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인도 농민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식민 인도에서 농민 봉기의 ‘양상’은 어떠했을까? 때려 부수기, 불 지르기, 먹기, 빼앗기! 적의 권위의 상징을 부수고, 적의 화려한 주택과 관공서에 불을 지르고, 지주와 대금업자의 가축을 먹어 치우고, 금품을 빼앗는다. 각각으로 보면 그저 파괴와 약탈처럼 보이는 이 행위들은 적절한 형식으로 결합함으로써 식민 인도에서 봉기의 요소가 될 수 있었다.

당연히 봉기에는, 곧 딩, 비드로하, 울굴란, 훌, 휘뚜리에는 ‘연대’가 필요하다. 인도에서 그 연대는 기본적으로 “5개의 번외 카스트”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전통적인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계급의식으로 무장되지는 않았으나, 배신자들에 대한 배제와 처벌은 무시무시했다.

한 곳에서 시작된 봉기는 ‘전파’된다. 영국과 인도의 관리들은 이를 ‘전염’ 또는 ‘감염’이라 부르지만, 농민은 봉기를 ‘집단 사업’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들은 농촌에서 협동하며 농사를 짓듯이, 집단 사냥을 나가고 집단 어로 활동를 하듯이, 봉기에서 함께했다. 그리고 이 전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루머’였다. 과학적 인식과 정확한 지휘가 아닌 루머!

끝으로 ‘영토성’이 기초적 측면의 하나였다. ‘쑤드’ 또는 ‘디쿠’라 불린 외지인이 자신의 영토에서 벌이는 행위에 대한 반감과 배타가 식민지 인도의 농민 봉기에서 분명 중요한 작용을 한 것이다. 이방인이 출현하기 이전인 ‘그때’와 이방인이 출현한 ‘지금’을 비교하면서, 인도의 농민들은 새로운 천년왕국을 준비한 것이다.

저자는 독일 농민전쟁을 연구한 치머만과 엥겔스, 프랑스혁명기 농민의 운동을 다룬 르페브르, 중국혁명을 이끈 마오쩌둥, ‘서발턴’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그람시 등의 논지를 자신의 소결과 연결시킨다. 비록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지역에서 벌어진 운동들이지만 그것들 모두에 공통된 어떤 것이 있는 것이다.

오랜 전통의 힌두 경전, 매우 낯선 인도 방언들은 독서를 방해하기보다는 식민 인도 서발턴인 농민들의 모습을 생생하기 전달하기 위한 도구처럼 느껴진다. “식민 인도에서의 농민 봉기의 기초적 측면들”이라는 원제가 매우 딱딱하게 느껴질지 모르나, 『서발턴과 봉기』는 마치 『수호전』과 같은 매우 재미있는 역사서이다.

원문 링크 ;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 ··· 85022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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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8 11:00 2008/12/18 11:00

너무 늦게 나왔다. {젠더 트러블}의 판권이 팔렸다는 소식은 진즉에 들었는데, 이제서야 출간되었다. 이 책을 어떻게든 읽어보겠다고 못하는 영어 원서를 들고 씨름하기도 했다. 가장 빠른 시일 내로 구입해서 열독할 책 1호다. 최근 또 한 권의 버틀러 책 {불확실한 삶}(클릭)이 출간되었다. 2001년 9.11 사건 이후 버틀러의 논문들이 실린 책으로, 버틀러의 폭력론과 애도론을 확인할 수 있는 저작이다. 연말 '버틀러 선물'이다. 아래 {젠더 트러블}의 출판사 서평을 옮겨온다.



젠더 트러블 -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주디스 버틀러 (지은이), 조현준 (옮긴이) | 문학동네


페미니즘 이론의 고전, 『젠더 트러블』 드디어 국내 출간!

현존하는 최고의 페미니즘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의 주저 『젠더 트러블』이 드디어 국내에 출간되었다. 섹스(sex)와 젠더(gender)의 구분을 허물고, 지배 권력의 토대인 가부장적 이성애주의의 본질을 폭로함으로써 기존 페미니즘의 패러다임을 단숨에 전복시킨 이 책은, 역대 최고의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주디스 버틀러를 학계의 슈퍼스타로 등극시켰다. 또한 버틀러는 이 책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 지그문트 프로이트, 자크 라캉, 자크 데리다, 그리고 미셸 푸코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현대 철학자들을 ‘퀴어 이론’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조망했다. 그녀는 기존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성/문화적으로 구성된 성/본능적인 욕망이라는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구분이 지배 이데올로기의 반복된 각인 행위를 통해 자연스러운 것으로 조작된 것이며, 그 기저에는 이성애자만이 주체이고 동성애자는 비체(abject)라고 선언하는 가부장적 이성애 중심주의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규범이 만든 허구이자 규제가 만든 이상이라는 의미에서 제도, 실천, 담론의 효과이고, 결국 그 셋 모두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의미에서 광의의 젠더로 수렴되는 것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이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포괄하는 급진적 정치학이 되기 위해서는, 섹스 안에 전제된 문화적, 제도적 규제를 꿰뚫어보아야 하며, 어떤 특정한 섹슈얼리티를 비체의 기준으로 삼는 규율 권력의 지식 생산체계에도 비판적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버틀러는 주장한다.
한 그 자신 레즈비언이기도 한 버틀러는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젠더 자체의 불확실성과 불확정성을 토대로, 동성애와 이성애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제도 담론의 권력 효과임을 폭로하고자 한다. 이는 페미니즘 이론이 여성의 권리 향상 차원을 넘어 남성까지 포함한 소수자의 섹슈얼리티 문제로 관심이 확대되는 지점이다. 동성애에 대한 버틀러의 새로운 인식론을 ‘퀴어(Qeer) 이론’이라고 부르는데, ‘퀴어’는 원래 동성애자들을 경멸적으로 부르던 호칭이었으나, 버틀러에 이르러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의미를 고정하는 모든 담론적 권력에 저항하는 전복의 표어가 된다.
결국 버틀러는 모든 정체성은 문화와 사회가 반복적으로 주입한 허구적 구성물이라고 주장하며 그런 의미에서 섹스나 섹슈얼리티도 ‘젠더’라고 말한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젠더는 없다”. 모든 것은 법과 권력과 담론의 이차적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의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구분되지 않을뿐더러, 젠더마저도 명사로 고정하거나 규정할 수 없다. 몸도, 정체성도, 욕망마저도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의미에서 모두 젠더이고, 그런 젠더는 안정될 수 없어 부표하는 인공물이자 동사이다.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에 강제된 질서를 뒤집는 전복적 상상력!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1부는 주로 ‘여성 없는 페미니즘’, 정확히 말하면 여성이라는 범주가 없는 페미니즘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도발적 문제 제기의 장이다. 2부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비판하면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 3부에서는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모성적 몸과 기호계 논의를 비판하고, 위티그나 푸코 논의의 장점과 한계를 지적하면서 버틀러 자신의 독특한 젠더 논의를 정리해나간다.

1부 「섹스/젠더/욕망의 주체들」은 페미니즘의 주체에 대한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을 모색하며 뤼스 이리가레나 모니크 위티그의 문제의식을 끌어와서 이들의 기여와 한계점을 밝히고자 한다. 이리가레는 프로이트 식의 결핍이나 결여로서의 여성성을 극복하려 했지만, 여성을 다시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적 언어 안의 재현 불가능성으로 고정한다는 혐의로 비판받는다.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모니크 위티그는 강제적 이성애와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에서 여성도 남성도 아닌 레즈비언을 대안적인 성으로 고정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 장에서 핵심적인 사상은 페미니즘의 주체로서의 ‘여성들’은 아무리 복수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해도 범주화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미 섹스/젠더/섹슈얼리티를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성/문화적으로 구성된 성/근본적이고 기원적인 욕망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강제적 질서에 따르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섹스/젠더/섹슈얼리티는 몸/정체성/욕망으로 분명하게 구획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제도문화의 이차적 구성물이자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광의의 젠더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2부 「금지, 정신분석학, 그리고 이성애적 모태의 생산」은 구조주의, 정신분석학, 페미니즘의 틀 안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들을 비판하려는 것이다. 여성을 교환 대상으로 바라보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뿐 아니라 조앤 리비에르 이래로 여성을 가면으로 의미화하려는 정신분석학적인 논의들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특히 결여를 가리기 위한 가면으로서의 여성의 상징적 위치를 ‘팔루스 되기/가지기’라고 본 자크 라캉의 논의는 비판의 핵심에 있다. 게일 루빈이나 뤼스 이리가레도 또다른 방식으로 여성성을 물화한다는 혐의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버틀러는 여성 젠더의 일의성을 주장하며 젠더 정체성의 이분법에 의지하는 모든 논의들을 비판하면서 프로이트가 말하는 우울증의 방식으로, 즉 사랑했던 대상이 주체의 에고로 ‘불완전하게 합체’되는 방식으로 젠더가 형성되는 과정을 논의한다. 정신분석학은 욕망을 전제한 뒤 그 욕망을 금지하는 법을 말하지만, 버틀러의 계보학은 그런 욕망이 선험적으로 원인이라 가정해두는 정신분석학의 전제에 들어 있는 규범을 보여주고자 한다. 푸코의 『성의 역사』에 나타난 억압가설 비판처럼, 금지구조나 사법구조는 원래 억압해야 할 욕망을 전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욕망 역시 당대의 지배적 권력구조가 만들어낸 구성물임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몸이 영혼의 감옥인 것이 아니라, 영혼이 몸의 감옥이 된다.

마지막 3부 「전복적 몸짓들」은 줄리아 크리스테바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된다. 크리스테바는 기본적으로 모든 섹슈얼리티를 이성애로 상정했고, 동성애는 정신병에 가까운 것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버틀러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녀의 이론은 재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이성애를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에 모성성을 특화하고 있으며, 라캉을 극복하려던 저항의 시도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코라나 기호계, 혹은 모성적 육체는 상징계의 언어로 발화되지 않으면 인식 불가능한 것으로서 저항의 전복적 실천력을 상실했으며, 오히려 크리스테바의 논의는 모성의 재생산을 강화하고 어머니를 이상화하여 가부장제를 공고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비판이다. 위티그나 푸코 역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위티그는 레즈비언 주체를 제3의 주체로 이상화하면서, 또다시 어떤 이상적 대상으로 고정하는 실수를 범했다고 비판당한다. 보편적 주체의 관점에서 논의를 진행했던 푸코는 남성을 보편 주체로 인식할 뿐 여성이라는 성차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간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을 받아왔는데, 버틀러는 여기에 더해서, 푸코가 에르퀼린 바르뱅의 일기에 부치는 서문에서 『성의 역사』와 달리 양성인간 에르퀼린이 제도 규범하에서 겪었던 사회적 비극보다는 특정 섹슈얼리티의 낭만화와 이상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비판한다. 마지막에 버틀러는 메리 더글러스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논의를 끌어와 몸의 경계와 표면은 정치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몸의 범주를 자연스럽지 않은 것으로 만들면서 새로운 의미화의 장으로 열어낼 때, 섹스와 젠더와 섹슈얼리티는 이분법을 넘어서 모든 고정된 범주를 파괴하며 전복적 재의미화를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버틀러가 주장하는 패러디적 수행성이고, 우울증적인 반복 복종의 실천들이다.

버틀러는 이 책의 결론에 해당하는 장의 제목을 ‘패러디에서 정치성으로’라고 썼다. 이는 드래그나 복장 도착 등의 ‘젠더 패러디’에서 출발한 젠더 논의가 수행성, 반복 복종, 그리고 우울증이라는 여러 이론적 비판과 재검토, 재의미화의 과정을 거쳐 ‘퀴어 이론’이라는 정치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은 근 20년이 지나도록 페미니즘 이론의 중심에 자리하며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그 특유의 어려운 문체로 읽기가 쉽지 않다. 그녀는 1999년 미국의 학술지 『철학과문학』에서 ‘최악의 저자’로 뽑혔을 만큼 미국 내에서도 난해한 글쓰기로 악명이 높다. 그러니 그 해석과 번역은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 해서 이 책에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맨 앞에 『젠더 트러블』의 핵심 용어를 정리한 「버틀러의 주요 개념들」과 『젠더 트러블』의 내용과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을 쉽고 간결하게 알려주는 「옮긴이 해제」를 덧붙였다.

원문 링크 :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 ··· D2464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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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8 10:20 2008/12/18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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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점 코난』. 한국어판 표지는 항상 사건의 중요한 배경이 나온다.

*이 글에는 『명탐점 코난 62권』에 대한 매우 중요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조심하시길.

“신이치가 돌아왔다!” 『명탐점 코난』(Aoyama Gosho 지음)의 애독자라면 이 말에 가슴이 두근거릴 것이다. 정체모를 범죄단체가 만든 신약을 우연히 먹고 고딩에서 초딩으로 변해버린 쿠도 신이치. 매우 유명한 고교탐정이었던 그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범죄단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며 활동하기 위해 ‘코난’이라는 가명을 사용한다. 코난은 진솔하지만 매우 허술한 탐정 모리 코고로를 도와 숱한 사건을 해결하며 ‘잠자는 명탐정 코고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코난의 강력한 조력자 박사님이 만든 마취 총과 음성변조기를 활용하여 코고로를 잠재운 뒤에 코고로의 목소리로 사건을 풀어온 것이다.

언제까지 코난으로만 있을 것 같던 신이치는 62권(2008년 10월 출간)에서 우연한 기회에 다시 고교생이 되어 사건을 해결하게 된다. 작가도 설레였던 것일까. 오랜 만에 신이치가 등장한 사건은 지금까지 경험한 그 어떤 사건보다도 흥미진진하다. 오랜만에 고교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이치는 기억을 잃고 살인범이 된다. 게다가 그가 예전에 해결한 사건도 결정적인 살인 동기가 잘못된 것으로 밝혀져 다시 미궁 속으로 빠진다. 신이치 사건해결사에서 오점이 될 사건인 것일까. 그는 정말 살인을 했을까. 물론 결국 이 사건도 신이치의 화려한 활약으로 해결이 된다. 해결의 실마리는 이 사건을 기획한 사람이 신이치와 똑같은 얼굴이었던 것에서 풀린다. 얼굴이 같다니. 어떻게 된 것일까. 결과는 직접 보시라.

그런데 신이치가 고교생이 된 것은 그냥 단순한 재미를 위한 설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뭔가 신이치(코난)의 감정에 미묘한 변화가 생기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다음 대사를 곱씹으며 63권을 기다린다. “너무도 불행한 우연이 낳은…. 통곡하며 무너지는 자신의 얼굴을 눈앞에 두고 나는 생각했다…. 이 얼굴을 잊어선 안 된다…. 내 안에 깊이 새겨둬야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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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31 20:51 2008/10/31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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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여름. 이렇게 적고 보니 정말 멀게 느껴지는 때이다. 그 때 우리 집에는 물이 차 있었다. 여름 장마와 한 건설회사가 수로를 막아 (생각해보니) 다소 어이없는 수해를 입었던 것이다. 수해보다 연인과의 헤어짐이 더 힘들었던 나는 나름대로 수해를 즐기는 상황이 되었다. 옥탑방에서 자는 것도 새로웠고, 시멘트 바닥에 찬 물을 말리기 위해 선풍기와 보일러를 틀어 놓은 방에서 황석영의 『손님』을 읽는 재미도 괜찮았다. 이 때가 20대 이후 가장 한가한 때였고, 그래서 그만큼 내겐 쉽지 않은 때이기도 했다. 뭔가를 해야 살아있음을 느끼는 내게 집-알바를 오가는 상황은 무료하기만 했다.

종로3가의 한 팬시점에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일을 하고, 집에 오고, 방학 동안에 다 읽기로 다짐한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를 정독하고. 이런 단조로운 생활이 반복되는 여름. 이 때 가장 재미있었던 경험은 서울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애니를 보는 것이었다. 그 후로 한 번도 이 행사에 가서 애니를 보지 못했기에 그 때의 기억은 생생하고 소중하게 남아 있다. 무턱대고 개막식 상영관(정동극장)에 찾아갔다 입석을 끊어서 개막작 <메트로폴리스>와 감독 린 타로를 보게 되었고, 그 다음날에도 무작정 심야상영을 보겠다고 찾아갔다 입석을 끊어 새벽까지 애니를 보았다. 물론 두 번 다 요행으로 자리에 앉아서 영화를 보았다. 개막식에는 빈자리가 조금 있어서, 심야상영에서는 한 애니평론가 혹은 기자가 영화가 시작하자 짐을 싸서 가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내가 (기사로만) ‘아는’ 기자였고, 짐 싸는 폼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아서 그 자리를 내가 차고 앉았다. 다행이도 그는 오지 않았다. 상영작은 <원령공주>, <라스트 뱀파이어>, 그리고 기억이 안 나는 미국 풍자 애니.

정은임의 라디오 방송에서 애니메이션 음악을 소개하는 것을 듣다 옛 기억에 빠졌다. 그 덕에 <메트로폴리스>를 기회가 생기면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트로폴리스>는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이다. 린 타로 감독은 애니 <X>의 극장판 감독이며 화려한 영상을 구사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영화감독 서극과 비슷하게 생겼던 것 같다. 간혹 나는 <메트로폴리스>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 “영화 <A.I.>와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라고 소개하곤 한다. ‘로봇이 “Who am I?"라는 질문을 갖게 되었을 때, 그것은 어떻게 풀려야 할까’라는 질문이 이 두 영화를 관통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을 푸는 서사 구조와 표현은 많이 다르다. (이것을 다 쓸 여유는 없으니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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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스>에서 내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I can't stop loving you 가 흐르면서 도시가 무너지는 장면이다. 이 곡만 들으면 노래가 슬픈데, 애니에서는 그렇게 슬프지가 않다. ‘도시가 무너지는 구나’ 정도이지 ‘어쩌면 좋아’는 아니다. 보면 그대로 수용하게 된다. ‘무너지네. 어쩔 수 없지 뭐. 다시 잘 살아 보자고. 잘 되겠지 뭐.’ 이런 식으로. 사실 무너지는 장면이 예쁘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 드는 생각은, 진정한 해체는 구축일 수밖에 없는데 감독은 도시의 무너짐(해체)이 새로운 것을 구축하는 것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영화의 끝, 도시가 무너지고 난 다음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각자가 다를 것이다. 같이 볼 사람과 이 이야기를 하게 되면 재미있을 것 같다. 그래서 약간 흥분된다. (근데, 혼자 보면 어쩌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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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3 12:33 2008/02/23 12:33

얼마 전에 <사랑니>를 두 번째로 봤다. 정유미의 불안하고 풋풋한 연기를 한 번 더 보고 싶고, 이 영화에서 겹쳐지는 인물과 시간의 구성을 미흡하게 이해한 면이 있어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다시 보니 정유미의 연기는 더 좋았고, 이 영화의 같지만 다른 인물과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을 뒤섞어 버리는 서사 구조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현재 하고 있는 사랑에서 문득 옛 연인과의 비슷한 상황과 행위를 마주치게 되면 기분이 묘한데, <사랑니>는 이 순간을 잘 포착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를 끈질기게 묻는다.

이 영화의 시간 개념이 공간적으로 단번에 드러나는 장면은 조인영(김정은 분)이 자기 집에서 러닝머신으로 운동을 하는 장면이다. 한국형 옛집 지붕 아래에 어색하게 놓인 러닝머신과 그 위에서 자연스럽게 운동을 하는 조인영의 모습은 시간이 응축된 공간을 보여준다. 이런 공간은 시간에 의해 교란되고, 주체의 정동에 의해 교란된다. 후반부에 고등학생 이석, 30살의 이석, 정우 그리고 30살의 조인영이 인영-정우의 집에 모여 있는 한 장면에서 공간의 교란은 잘 나타난다. 평상에 누운 30살 이석은 옆에 같이 누워있는 정우에게 나무에 핀 꽃을 보며 “꽃이 피었네” 하고 말한다. 정우는 “꽃이 피었지” 하고 응수한다. 지금까지 30살 이석과 정우와 잘 어울리지 못하던 고등학생 이석도 “정말 꽃이 피었네” 하고 말한다. 그리고 인영과 이석은 마주 보고 웃는다. 고등학생 이석이 본 것은 지난날 모텔에서 인영이 들고 온 난에 핀 꽃이다. 인영과 이석은 다른 꽃을 보며 다른 기억을 느낀 것이다.

이 영화에서 이 세 명의 남성이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이 돈다. 그들이 모두 인영과 사랑하는 관계라는 긴장감과 그들이 각각 차지하고 있는 시간 때문에 그렇다. 그들은 어떤 측면에서는 과거에만 있거나 현재에만 있거나 그래야 하는 존재들이지 같은 공간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그들은 그 공간에서 모두 ‘동상이몽’을 꾸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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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은 시간과 주체의 정동에 의해 교란된다.


영화에는 하이힐이 몇 번 등장한다. 하이힐을 카메라가 주목하는 장면은 두 번 정도이지만 30살 조인영이 하이힐을 일상 시에도 싣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꽤 자주 나온다. 고등학생 이석에 대한 사랑이 옛 첫사랑에 대한 사랑인지 아닌지 고민하던 인영은 영화 중반부에 가면 현재의 고등학생 이석을 자신이 사랑함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닌 듯하다. 옛 사랑이 아닌 현재의 사랑이지만 현재의 사랑이 옛 사랑보다 반드시 더 강렬한 것이 아닌 만큼 인영은 옛 사랑에 대한 상념에 빠진다. 혹은 사랑 그 자체에 대한 생각에 빠진다. 이 때 인영은 차 속에서 하이힐을 벗어놓고 있다. 조수석에 하이힐을 비추고 카메라는 인영의 발을 보여준다. 그 발뒤꿈치에는 반창고가 붙어 있다. 그녀는 아픔을 참으면서 하이힐을 신고 있었던 것이다.

하이힐은 분명 여성들에게는 강요된 미적 도구이다. 하지만 이 강요 속에서 여성들은 하이힐을 선택해서 신으며 자신의 미를 찾고 자신감을 갖기도 한다. 사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속에서의 여성은 항상 이중적이다. 온전한 강요가 없으며 온전한 능동성이 없다. 여성들은 이 사이에서 계속 교섭하고 엇나간다. 하이힐은 예쁘지만 아픈 존재이다. 고등학생 인영이 고등학생 이석이 다른 사랑을 택한 것이 너무 슬퍼 눈물로 양호실에 누워있을 때 양호 선생님은 인영을 재우고 실내화를 벗고 하이힐을 신으며 거울에 자신의 다리를 비춰본다. 그리고 30살 인영은 하이힐을 벗고 묘한 사랑에 대한 상념에 빠진다.

인영에게 자신이 인정하게 된 사랑도 이런 하이힐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고등학생 이석을 사랑하는 게 현재 조건에서는 손가락질 받는 일이다(‘원조교제’. 영화에서 인영은 이것 때문에 학원 학생들에게 따돌림 당한다). 하지만 이 보다 더 고민인 것은 자신의 안에 있었던 사랑이 계속 변하고 요동치며 뭔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일 것이다. 그녀는 현재 동거남 정우와 옛 사랑 30살 이석, 그리고 현재 새롭게 사랑하게 된 고등학생 이석의 사랑 속에서 아픈 사랑니를 어루만진다. 사랑니. 사랑이라는 말에 붙은 아픈 것이 아니겠는가.

영화 마지막 장면. 맹장 수술을 한 고등학생 인영은 고등학생 정우에게 말한다. “나 다시 태어나면 이석이 되고 싶다”고 말이다. 이 말은 쉬운 말이 아니라 좀 더 곱씹어 보고 있다. 인영은 왜 이석이 되고 싶어 했을까. 그가 되면 그녀는 사랑을 온전히 맞이하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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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다시 태어나면 이석이 되고 싶어' 그가 되면 그녀는 사랑을 온전하게 맞이하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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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03 18:25 2008/01/03 18:25

『디아스포라 기행』이후 서경식의 두 번째 책이다. 그의 글쓰기는 쉬우면서도 한 호흡에 읽을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도 쉽게 읽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언급되는 사람들의 삶이 '쉽게' 읽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파시즘, 제국주의 등에 목숨을 걸고, 어쩔 때는 목숨을 버리며 치열하게 싸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의 사상에 민족(국가)주의의 그늘이 보이지만,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싸운 그들의 삶에서는 배울 것들이 많다. 오늘자 <한겨레>에 문학평론가 권성우가 '근대문학의 종언' 논쟁에 대해 쓴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이 시대의 어떤 시나 소설보다도 우리 사회의 현실에 밀도 깊게 대응하면서 ‘타자’와 ‘소수자’에 대한 연대와 공감을 감동적으로 환기시킨 서경식의 탁월한 산문(<시대를 건너는 법> <디아스포라 기행>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 등등)에 대한 본격비평을 본 적이 있는가? "

오늘날 한국 문학의 위기는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시스템과 현실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며, 위와 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관점이라고 생각했다. 서경식의 글에는 이 시대의 문제들을 통렬하게 지적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글을 읽으며 답답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의 시대 진단은 '암울의 정서'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성찰에 이 시대의 문제들을 고민하지만 이 시대를 어떻게 변화시킬지는 그 성찰에서는 찾기가 쉽지 않다. 조금 더 조심히 읽으며 고민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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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03 11:48 2007/11/03 11:48

once, 그 첫 번째 : 한때

Guy는 노트북 앞에서 가사를 적고 있다. 그는 한참 화면을 보다 가사를 다시 읽는다. 그리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그가 뭘 보고 있었던 걸까. 그가 보고 있던 것은 캠코더로 찍은 흔들리는 영상이다. 그 영상엔 두 명, 한 연인이 나온다. 리듬도 가사도 슬프다. 그는 계속 노래 부른다. 아니 외친다. 너와 나 사이를 갈라놓은 것은 당신의 거짓말이었다고. 그들은 한때 연인이었다.

Girl은 잠시 쉬러 나왔다. 그는 방금까지 스튜디오에서 몇 시간 째 노래를 녹음하고 있었다. 호기심에 옆방을 봤다. 너무 예쁜 피아노가 스탠드의 은은한 빛을 받으며 어두운 방에 놓여 있다. 곧 Guy가 따라 온다. 그리고 그녀에게 노래를 불러 보라고 말한다. 그녀는 머뭇거리고 사양하다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슬픈 감정이 진정되지 않아 끝까지 부르지 못한다. 그는 이 노래를 싫어했었다. 그녀의 남편은 이 노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때 부부였다.


once, 그 두 번째 : 한 번

드르륵 드르륵. 길바닥에 청소기를 Girl이 끌고 간다. Guy와 함께. Guy는 Girl의 피아노 연주를 듣기 위해 악기가게로 가고 있다. 곧 그들은 아무도 없는 악기 가게에서 기타를 치고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른다. 열정적인 목소리를 가진 Guy와 낮지만 깊은 목소리를 가진 Girl. 그들의 소리는 너무 아름답다. 사랑스럽다. 한 번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한 번이었다.


동시에, 당장, 즉시(at once)

한때의 사랑, 한 번의 사랑. 그들은 서로를 만나며 두 가지 사랑을 함께 한다. 서로를 만날 때 한 번, 서로를 만났음으로 한 번. 음악과 연인을 찾아 런던으로 Guy는 가고, Girl은 남편과 함께 살기로 한다. 런던으로 가는 버스에 탄 Guy의 품에는 밤새 녹음한 CD가, Girl의 집에는 Guy와 함께 노래를 연주했던 피아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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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15 22:10 2007/10/15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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