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제3의 성: 히즈라

National Geographic Channel에서 방영(9/1/03)한 [터부: 성(Sexuality)] 중에서 "인도의 제3의 성: 히즈라" 부분만을 클립으로 올린다. 마침 전남대학교의 김경학교수가 번역해서 출판한 책 [남자도 아닌 여자도 아닌 히즈라](1998)가 있기에 인류학 영상교재로서의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관심있는 사람은 이 책과 함께 감상한다면 인도 사회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영상 클립에 대한 서현정 박사의 직접적인 해설에 이어서, 여기에 히즈라에 대한 이해를 돕기위해 인도에서 공부했고, 인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인도 현지에서 철저한 fieldwork을 수행한 경험이 있는 전남대학교 인류학과 김경학교수의 히즈라에 대한 해설을 부탁해본다. 그는 이미 히즈라에 대한 책을 번역한 바 있기에 아마도 더 이상 적절한 분이 없을 것 같다. (이문웅)

참조: 세레나 난다(Serena Nanda)의 [남자도 아닌 여자도 아닌 히즈라](Neither Man Nor Women: The Hijras of India, 1990), (김경학 옮김), 한겨레신문사(1998).
=======================================

인도의 제3의 성: 히즈라]

세상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성을 완전히 포기해야만 한다면 어떠할까?

새로운 성을 확정하는 것이 어떤 곳에서는 전혀 새로운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져다준다. 10억이 넘는 인구를 갖고 있는 인도는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분리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히즈라(Hijra)는 가장 중요하고도 심오한 면에서 남들과는 다른 사람들로, 완전한 남자도 여자도 아닌 제 3의 성을 지닌 사람들이다. 모나 아메드 역시 히즈라이다. 히즈라는 거세를 받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인도인들은 이들을 자웅동체, 동성연애자, 성불능자, 또는 소명을 받은 자로 여긴다. 이들은 남자도 아니고 남자로 살 수도 없다. 모나 역시 남자로 태어났지만 마음 깊은 곳에 다른 느낌이 있었다고 말한다. 스스로 남자로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인도에서는 성전환 수술이나 동성연애가 불법이므로 그에게 방법은 히즈라가 되는 것 밖에는 없었다. 히즈라가 되기 위해서 남성의 성기를 제거하여야 했고 거세 후 가슴이 생기고 털이 없어지고 목소리가 바뀌는 신체적 변화를 경험한다. 성기뿐 아니라 성(性)호르몬도 없애는 거세의 탓이었다. 많은 문화에서 제 3의 성은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이다. 특히 종교들의 관점은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불교나 힌두교는 다른 종교들에 비해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많은 문화에서 거세라는 현상을 살펴볼 수 있지만 현재는 거의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문화적 특성을 배경으로 하여 인도에는 이들 히즈라가 여전히 50만이나 남아있다. 모나는 공연수로서 여러 다양한 행사들에서 춤추고 노래한다. 그리고 사회의 이방인으로서 그 수입으로 살아간다. 히즈라들은 자신들끼리 사제관계, 공동주거로 일종의 가족을 형성한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이들을 감정적, 경제적으로 더욱 뭉치게 하는 것이다.

이들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존재이므로 초자연적인 느낌을 준다. 인도인들은 이들이 축복과 저주를 모두 내리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갖추었기에 특별한 힘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이나 탄생 축하 잔치에 축복과 공연으로 돈을 번다. 그러나 이들은 그와 동시에 공포와 두려움, 거부감의 존재가 되기도 한다. 사회가 서구화될수록 난폭하고 거칠고 시끄러운 이들을 꺼려하고 부끄럽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히즈라의 경제적 기반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자신이 히즈라가 아닌 한사람의 인간으로 보여지길 바라는 것이 모나의 간절한 소망이다.

(정리: 서현정,; 서울대 인류학과 졸업, 박사, 2001년; 서울대 강사)


=======================================
인도의 히즈라(Hijras): (김경학 교수)

서구문화는 일반적으로 이분법적 특성이 있다. 즉 정신과 신체, 남성과 여성, 동양과 서양, 동성애와 이성애 등 세상은 철저히 이항 대립적으로 분화되어 있으며, 이의 분류와 모순되는 범주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취급을 받는다. 따라서 생물학적 성과 문화적 성을 이분법적이고 귀속적이며 불변하는 것으로 보는 서구적 보편주의 내에서는, 이분화 된 성 범주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 예컨대 태어날 때부터 양성적인 사람들(양성구유자)과 자신의 생물학적 성과 반대되는 성에 해당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동성애자와 성전환 열망자)은 외과적인 수술을 통해서든 정신과적 치료를 통해 어느 한 편의 성으로 교정을 받아야 할 대상이 된다.
그러나 다양한 비서구 문화는 이러한 이분화 된 성 체계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처리하는 다양한 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둘 이상의 문화적 성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신화 상으로나 현실적으로도 생물학적 성과 문화적 성이 개인의 일생에 걸쳐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문화적인 사례들은 서구의 성 범주와 성애적 정체성이 그 사람의 모든 정체성을 결정짓는 것으로 보는 서구의 보편주의에 대한 재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분화 된 성 체계에 대해 도전하고 있는 문화들에는 인도의 히즈라(hijra)집단, 사우디 반도의 이슬람사회인 오만(Oman)의 한에쓰(xanith)집단, 북미 원주민의 베르다체(berdache), 타히티(Tahiti)섬의 마후(Mahu)집단 등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생물학적 성과 반대되거나 또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성“ 또는 “또 하나의 성”(alternative gender) 범주에 속하는 성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동성애적 관계에서 수동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들 문화는 서구의 성의 이분화와는 달리 다양한 문화적 성 정체성을 인정하고 있다. 예컨대 북미원주민들 가운데 모하브족(Mohave)은 4가지 종류의 성 정체성, 예컨대 여성, 남성적 속성을 지닌 여성(여성 베르다체), 남성, 여성적 속성을 지닌 남성(남성 베르다체)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은 문화적 사례 가운데 오늘날까지도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또 하나의 성” 범주 집단인 인도의 히즈라(Hijra)를 다소 상세히 소개함으로써 서구적 성 범주에 대해 재고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인도의 히즈라는 여장을 하고 여성처럼 행동하는 남성들로 구성된 다소 종교적 색채를 지닌 공동체이다. 히즈라 문화는 모신(Mother Goddess)을 섬기기 위해 자신들의 생식기 제거수술을 받는다. 이 거세수술에는 남근과 고환이 외과적으로 제거되지만, 서구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성전환 수술처럼 그 곳에 여성의 질을 이식하지는 않는다. 거세수술을 통해 히즈라들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존재로 규정을 받는다. 이들의 전통적 역할은 애매모호한 자신들의 생물학적 성의 특성 때문에 남아의 탄생과 혼인의례 끝에 다산과 가계의 지속을 강복하는 의례의 수행이다. 히즈라의 전통적 역할이 영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양성구유적 속성과 금욕주의적 속성을 지니는 인도 신성의 삼위일체의 하나인 쉬바신(Shiva)과 모신에 히즈라가 자신들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이들을 현지조사한 미국의 인류학자 세레나 난다(Serera Nanda)는 수많은 히즈라들 가운데에서 대표성을 띠고 있는 4명 히즈라의 생애사(life history)를 그녀의 저서 ꡔ남자도 아닌 여자도 아닌 히즈라ꡕ(1998, 한겨레신문사)에서 소개함으로써 히즈라들의 다양한 특성을 분석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적인 점은 모두가 생물학적으로는 남아로 태어나, 그 이후의 인생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히즈라가 되는 과정은 급진적이지 않고 상당히 점진적이다. 사람들은 청소년기에 자신과 반대되는 성적 특성을 보일 수도 있다. 예컨대 여장을 하고 여자처럼 소변보고 여성 이름을 지어 부르고, 몸짓, 말투뿐만 아니라 여자와만 손잡고 놀러 다니는 등 모든 면에서 여성적인 특징을 보일 수 있다.
이러한 특징들을 보이는 청소년에 대한 타인들의 반응들, 예컨대 부모와 교사의 부정적인 처벌, 친구들의 괴롭힘, 다른 남자 청소년이나 성인들의 성적 접근 등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외부인들의 반응과 함께 집에서 멀리 도망쳐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욕구, 방해받지 않고 여성적인 행위를 하고 싶은 욕구, 남성들과 성관계를 맺으려는 욕구 등이 부과되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인정해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처럼 보이는 히즈라들과 비공식적 관계를 나누다가 결국 히즈라 공동체에 공식적으로 입문하게 된다.
물론 이들이 히즈라 공동체에 가입함으로써 자신의 성적 모호함을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다. 이러한 가입은 자신에게 새로운 성 역할을 급작스럽게 받아들이게 하지 않고 지금까지의 긴장과 가정불화로 가득 찬 과거 삶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히즈라 공동체로 공식적 입문한 이후에도 자신의 성 정체성의 모호함은 여러 해 지속될 수 있다. 이러한 성 정체성의 모호함은 자신이 거세수술을 받기로 결정을 내리기까지나 수술은 받은 후까지도 계속될 수 있다. 서구인들이 성전환수술을 받은 후 완전한 여성적 정체성을 갖게 된다고 주장하지만 히즈라의 사례를 통해서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는 것 같다. 수술 후에도 대부분의 히즈라들은 자신들의 동성애 빈도가 늘어감에 따라 남성이 아닌 여성적인 성 정체성이 점차 강화됨을 알 수 있다.
히즈라들의 이야기에 비추어 보면, 서구 사회과학의 보편적인 주장인 성 정체성과 그 역할이 초기 유년기의 결정적 시기(약 18개월부터 3살까지)에 일단 형성되어지면, 그것이 영구불변한다는 견해를 재고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인도의 히즈라 이야기들은 성 정체성과 성 역할이 인생의 후기에도 변화되어 질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동성애적 행위와 히즈라의 역할 간에 일련의 관련성이 있다는 점은 성 정체성의 발달과정이 급진적이 아닌 점진적인 성격을 보이며, 최소한 일부 사람들은 성 정체성 변화를 평생에 걸쳐 경험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인도의 히즈라 집단에 대한 이와 같은 분석은 다소 치우친 감이 있더라도, 그들이 다른 일반 인도인들과 많은 점들을 공유하고 있으며, 인도 사회와 문화의 많은 요소들을 자신들의 삶 속에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히즈라와 여타 문화에서 등장하는 또 하나의 성 범주에 속한 사람들은 문화적 성 범주와 인간 성애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비서구문화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성 역할과는 달리 서구의 성전환은 또 하나의 성 범주를 부정하고, 영속적인 이분화 된 생물학적 성과 문화적 성에 대한 문화적 구성물을 오히려 강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전자와는 크게 다르다. 따라서 서구문화는 성전환 열망자를 과도기적 지위로 규정지으며, 결국 전환을 열망하는 문화적 성에 맞게 생물학적 성을 만들어 줌으로써, 생물학적 성과 문화적 성간의 부조화의 딜레마를 빠져 나와, 성의 이분화라는 “흔들릴 수 없는 명제”를 지켜나간다.
우리 주변의 동성애자들의 자기 진술적 이야기에 따르면, 세상에는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이라는 이분법에 흡수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확고한 생각으로부터 보다 확고한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지닐 수 있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게이(남성 동성애자)나 레스비언(여성 동성애자)들이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을 견고하게 확립하게 되는 과정에는 인도의 히즈라의 경우와 유사한 면이 있다.

(김경학: 전남대학교 인류학과 교수)
 
 
 
출처 링크 :
http://vaa.anthropology.or.kr/dong/content.aspx?idx=248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08/06/19 23:42 2008/06/19 23:42
도그마적 성모럴 벗어던지자

‘사회문화적 성’에 대한 몰이해… 화랑과 히즈라, 버다치가 주는 교훈

S#1 자연스러운 것



92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과테말라 인디오복권운동가 리고베르타 멘추는 자서전 집필을 위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 우리는 동성애자인가 아닌가에 따라서 차별을 두지는 않습니다. 라디노(백인과 인디오 사이의 혼혈인종)들은 동성애자를 보면 참을 수 없는 듯이 혐오하는데, 인디오에게는 그 정도까지의 혐오감은 없습니다. 자연스러운 것은 모두 좋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서구 자본주의와 라디노정권에 대항하면서 형성된 그의 세계관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의 주장과 대척점에 있는, “섹스(sex)가 인간의 성정체성을 결정짓는다”는 주장은 몸의 기능에 따라 사람을 차별짓고 사회적 역할을 강요해왔다. 과연 생물학적 성과 다르게 움직이는 성은 비자연스러운 것일까?

한국사회에서 ‘사회문화적 성’(gender)에 대한 이해는 아직 일천한 수준인 것 같다. ‘남성 생식기’가 있고 없고에 따라 일상적 차별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심지어 그것이 고정불변의 것인 양 오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기나긴 한반도 역사 중에 조선 600년이라는 시간의 지층에 잠시 머무는 하프 타임일 뿐이다.

히즈라·버다치, 경외의 대상

S#2 히즈라(hijras), 여자도 아닌 남자도 아닌


사진/ 사내아이에게 강복하는 히즈라. 히즈라는 중성으로 태어난 사람들이나 생리적으론 남성이지만 여성적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을 의미한다.


우리는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보편적인 성체계가 있다고 믿는 데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전세계 곳곳에서 보고되고 있는 ‘또 하나의 성’에 대한 사례들은 남성성/여성성, 혹은 이성애/동성애가 전부라는 고정관념에 강력하게 쐐기를 박는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사례는 바로 인도의 히즈라(hijras)다. 히즈라는 중성으로 태어난 사람들이나 생리적으론 남성이지만 여성적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을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성전환수술을 받았거나 그것을 지향하는 트랜스젠더와는 다르다. 이들은 델리, 봄베이와 같은 인도 거대도시 안에서 하위문화를 형성하며 집단으로 존재하는데, 탄생과 혼인 같은 경조사에서 의례를 집전하며 사람들에 따라서는 ‘남편’을 맞이해 살기도 한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다름(dharm: 종교적 의무), 혹은 니르반(nirvan: 무욕과 평정의 상태)이다. 이상적인 히즈라로서 정체성을 지니면 집단의 우두머리인 ‘구루’의 영예를 얻기도 한다.

특이한 것은 인도사람들이 그들을 부정적으로 생각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도인들은 신의 매개자로서 히즈라를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으로 삼았다. 다양한 성애와 성정체성을 실험했던 힌두신 크리슈나를 통해 삶이 획일적인 성체계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문화인류학은 히즈라와 같은 용인된 ‘또 하나의 성’이 세계 곳곳에 존재했음을 속속들이 밝힌다. 사우디아라비아 반도에 자리한 이슬람 국가 오만의 한에스(xanith) 집단, 타히티섬의 마후(mahu) 집단, 삼비아의 투님-투님, 도미니크공화국의 구에베도체 등에서 발견되는 모호한 성은 남성 아니면 여성, 이성애자 아니면 동성애자로 모든 것을 묶는 서구의 성체계가 어쩔 수 없는 타협으로 트랜스젠더라는 용어를 개발해낸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들은 인간이란 존재는 애매모호한 성들이 좌충우돌하는 지대이며, 이것은 곧 신들과 자연의 힘이 만들어낸 경이로운 성역임을 드러낸다.

오만의 한에스는 ‘여자 같은 그리고 부드러운’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여성들과 함께 팔짱끼고 노래를 부르지만 이슬람 율법에 따라 남성형으로 지칭된다. 또 성교시 수동적인 포즈를 취하지만 여성의 옷을 입거나 거세하지는 않는다.

S#3 버다치(berdache), 사회적 성


사진/ 북아메리카 150여 부족에 존재했던 버다치. 여성과 남성의 의상이 혼합된 옷을 즐겨 입었다.


북아메리카 어느 인디언 부족에서 성년식이 벌어지고 있다. 불을 지펴놓고 사람들은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한가운데 성년식 주인공인 소년이 서 있고 가족과 마을사람들은 노래 부르고 춤춘다.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는 사이, 소년이 여자의 노래를 부르거나 아기 바구니나 여자 옷을 가지고 불 바깥으로 빠져나오면 그 소년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여성도 아니고 남성도 아닌 새로운 삶을 살 권리를 갖는다. 사람들은 앞으로 그를 ‘아리하’(alyha)라고 부르게 된다. 여성은 ‘와메’(hwame)라 불린다. 16세기 이후 스페인을 비롯한 서구 열강의 선교자들은 이들을 ‘버다치’(수동적인 동성애자를 일컫는 프랑스 속어)라 부르며 난폭한 사냥개를 풀어 죽음으로 몰고 갔다.

북아메리카 150여개 이상 부족에 존재했던 버다치들은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들은 여성과 남성의 의상이 혼합된 옷을 즐겨 입었고, 남자를 배우자로 취해 버젓이 마을 가운데 움막을 짓기도 했다. 훗날 인디언사에서 용맹한 부족으로 이름을 떨쳤던 샤이엔족의 버다치들은 여성과 남성의 이름을 함께 지녀 반남반녀인 자신의 존재를 상징했다. 이렇듯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생물학적 성보다 중요한 것은 후천적으로 습득한 사회적 성이었다. 인디언들은 버다치들을 우주와 만물의 이치에 더 가까운 존재라 믿어 그들을 경외의 대상으로 삼았다.

혜공왕, 묘정, 공민왕…

S#4 화랑, 그 시작점

지금까지 설명한 ‘또 하나의 성’에 관한 사료들은 뒤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릴 수 있는 먼 나라 이야기일 수 있다. 여전히 한국사회는 ‘음양의 조화’가 모든 성모럴을 지탱하는 중요한 원천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조선사회의 성 관념은 남존여비를 유지하려는 지독한 가부장제(이것을 이성애라 표현하지 않는 것은 ‘이성애’ 역시 자신과 쌍방간의 성적 욕구와 사랑의 감정을 능동적으로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를 바탕으로 ‘또 하나의 성’은 물론 흔하디 흔한 동성간 성행위조차 아예 용인하지 않았다.

8살에 왕위에 올랐다가 여자놀이를 즐겼다고 신하들에게 살해당한 신라 혜공왕(삼국유사), 출중한 용모 때문에 신라 관리들은 물론 당나라 황제에까지 사랑을 받았다는 묘정(삼국유사), 노국공주가 죽자 아름다운 소년들을 가까이 해서 궁중 기강을 문란케 했다는 오명을 얻은 공민왕(고려사 세가), 소쌍이라는 시녀를 사랑했다가 궁궐에서 쫓겨나간 세종의 두 번째 며느리 봉씨(이조실록) 등의 사연은 사서의 희미한 흔적들로 남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조선시대 이전의 한반도 역사에 대해선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조선시대 초기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불태워졌던 전 시대의 수많은 ‘사랑의 찬가’들에 대해 추리만 할 뿐이다.

99년 이종욱 교수가 박창화의 필사본이 확실하다고 주장하며 출간한 <화랑세기>의 진위 여부를 놓고 벌어졌던 한국 사학계의 열띤 논쟁 저변에는 조선시대 이전의 성문화에 대한 엇갈린 감정들이 깔려 있다. <화랑세기>는 근친결혼, 자유로운 성 표현, 여성들의 능동적인 욕망과 모권제의 흔적들을 담고 있고, 해석에 따라 다르겠지만 화랑들이 누렸던 ‘부드럽고 여성스러운 사회적 성’ 내지는 동성애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근거들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화랑세기>의 진위 여부를 떠나, 안타까운 것은 천년 고도에서 터잡고 있을 당시 신라사회의 성문화에 대한 한국 사학자들의 관심과 연구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익이 <성호사설>에서 신라의 화랑과 낭도들을 남색자들로 싸잡아 비난했던 것이나, 1920년대 일본 학자들이 일본 봉건시대의 소성(小姓: 귀족 곁에서 시중드는 미소년)과 동성애 성격이 짙었던 사무라이 집단과 화랑의 유사성을 논했던 것에 대한 설득력 있는 비판과 연구를 한번도 접해보지 못했다. 오히려 고대 국가의 군사집단에서 적잖이 발견되는 동성간 성적의례의 한 갈래로 화랑과 낭도간의 관계를 설명해내려 했던 80년 이전의 일본 학자들의 성실성이 더 돋보인다.

죽지랑이 죽은 7일 만에 통곡하다 따라 죽은 사다함 이야기를 은근슬쩍 교우미담의 본보기로 치장하고 말았던 우리 학계의 무성실성은, 미소년들을 궁궐로 불러들였다는 진성왕에 대한 소문을 신빙성 없는 ‘사건과 야사’로 몰아 기각하려는 것만큼이나 신뢰를 얻지 못한다.

한 사회를 연구하고 그 사회의 성문화를 이해하는 데서 중요한 것은 생물학적 성이 사회적 성과 성적 욕망을 결정짓는다는 도그마적 믿음에서 해방되는 일이라 여긴다. 그런 의미에서 연구자들의 성실함만 전제된다면 기각되어도 상관없을 명제 하나를 제시하고 싶다. 그건 이렇다. 죽지랑과 사다함은 공인된 동성애자였다고.

이송희일/ 독립영화감독 heeil@dreamwiz.com


출처 링크
http://www.hani.co.kr/section-021003000 ··· 019.html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08/06/17 01:18 2008/06/17 01:18
히즈라hijra
from 공 부/트랜스젠더 2008/06/17 01:15

세레나 난다 지음, 한겨레출판, 1998.


"남자도 여자도 아닌 히즈라. 한 선배님으로부터 이 책을 소개받기 전까지는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말이었다. 물론 그랬기 때문에 더욱 호기심을 가지고 찾아보게 되었지만 말이다. ‘히즈라’는 많은 인구와 다양한 계급이 존재하는 인도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특이한 집단 중의 하나인데, 간단히 말해 성적(性的)인 면에 있어서 중성(中性)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얼핏 보기에 이들은 여성으로 보이지만 실은 태어날 때부터 중성(中性)으로 태어난 사람들이거나 혹은 어린 소년들을 납치해 거세한 후 그들과 같은 삶을 살게 한 경우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히즈라 집단은 중성으로 태어난 사람들과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으로 태어났으나 여성적 기질을 지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서양에서처럼 성전환 수술이나 정신과적 치료를 통해 어느 한 성으로 귀착하지 않는다는 것에 그 특징이 있다. 사실 원래는 ‘히즈라’ 라고 하는 중성으로 태어난 사람만을 지칭했던 용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부터는 남성으로 태어났으나 여성적 기질을 지니게 된 사람들도 이 히즈라 집단에 가입할 수 있게 되었다. 우선 `남자도 아닌 여자도 아닌 히즈라(Neither Man Nor Woman)`는 인류학자 세레나 난다(Serena Nanda)교수가 인도에서 6년에 걸쳐 조사한 히즈라 집단에 대한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분법적 성 분류체계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최근 하리수라는 트렌스젠더 연예인의 등장으로 이러한 성 체계에 관한 사회적인 관심이 더욱 고조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히즈라 라는 개념은 더욱 새롭게 다가왔다. 아까 앞에서도 잠깐 언급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선천적인 히즈라 외에도 거세를 통해 이 집단에 속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물론 모든 히즈라가 거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상적인 히즈라는 거세라는 행위를 통해 금욕주의를 실천함으로써 개인적으로는 영적인 힘을 얻게 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사회·문화적으로는 아기의 탄생과 혼인식과 같은 의례적 맥락에서 생산성을 기원하는 의례를 집전한다. 그러나 수많은 히즈라들이 자신들의 이상과는 달리 동성애적 매춘과 구걸이라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데 그 문제가 있다고 본다. 문제가 그렇다보니 요즘 인도 사회에서는 하층민에 속하는 이들에 대해 무관심이나 불결한 눈으로 바라보던 것에서 이들을 이해하고 자세히 알고자 하는 입장이 많아져 TV에서 특집 다큐멘터리로 다루거나 그들에 대한 책도 출판되고 있다. 실제 인도에 가보면 이들 히즈라는 일반 인도 여성들처럼, 아니 오히려 그들보다 더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다닌다고 한다. 원색의 사리에 진한 화장, 귀걸이, 코걸이, 팔찌, 심지어는 발가락지까지 하고 다니는 것이다. 물론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들의 모습은 분명 남성에 가깝지만 말이다. 사회에서 그리 고운 눈길을 받지 못하고 일반적인 직업을 구하기도 힘든 그들의 주 수입은 동냥이다. 그리고 혹은 경사스러운 일이 있는 집을 방문해 춤과 노래를 부르며 그들을 축복해 주고받는 돈 등이다."

출처 링크 :
http://bbs.joins.com/content.asp?board_ ··· rch_text=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08/06/17 01:15 2008/06/17 01:15
Tag // ,

이 글은 루인, 「젠더를 둘러싼 경합들(gender dysphoria): 트랜스/젠더 정치학을 모색하며」, 『여/성이론』 15호, 여이연, 2006에서 결론 절을 발췌한 것이다. 이 글을 요약하려 했지만 고민들이 정리되지 않아 한 절을 옮겨온다.

-----------------------------------

IV. 트랜스/젠더정치학을 모색하며

젠더 정치학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양성 간의 불평등이나 권력 관계를 다루는 것 혹은 젠더(여성)의 관점으로 세상을 다시 해석하는 인식론에서 ‘젠더란 무엇인가’하는 젠더 자체에 던지는 질문과 개개인들이 젠더와 어떻게 협상하고 수행하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경합․갈등․협상을 경험하는지를 질문하는 것으로 변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트랜스/젠더 정치학은 (트랜스)남성과 (트랜스)여성이 어떻게 젠더와 경합하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들(트랜스건 아니건 상관없이)이 여성, 남성이라는 젠더 호명과 어떻게 경합하고 협상하며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구성하는지를 묻고, 여성과 남성이 있다는 믿은 자체가 젠더(이데올로기/신화)이기에 그런 것이 환상임을 밝히는 작업이다. 이를 위한 한 방법으로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몸과 어떻게 경합․갈등․협상하는지를 묻는 질문구조 속에, 어떻게 시스젠더의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기거나 질문구조(문제시)에서 제외―질문 자체를 안 하는 방식―하고 있는지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 성기는 몸의 극히 일부일 뿐이지만 과잉 의미화하는 언어체계에서 그것 자체를 다시 질문하자는 것이며, 그리하여 트랜스젠더를 통해 시스젠더를 안정화하는 구조를 질문하고 남성/여성이란 체계 자체를 질문하자는 것이다. 시스젠더의 몸 역시 구성적인 몽일 때, 트랜스젠더의 몸만이 구성이 아니라 시스젠더의 몸 역시 외과적 구성임을 제기하고, 트랜스젠더의 몸이 사회적(/외과적) 구성이라고 말하는 그 권력 작동(해석체계)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 서로가 서로의 젠더를 구성하고 ‘안정화’함으로써 환성을 구축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젠더가 이미 있다고 가정하면 그것이 아무리 구성 중에 있는 것이라고 말을 해도 결국 본질주의와 결정론의 덫에 빠지기 쉽다. 젠더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정말 구성 중에 있는 과정이라면, 젠더란 무엇인지, 젠더가 끊임없이 의미를 가지게끔 하는 체계는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상대방을 특정 젠더라는 건 어떤 맥락 속에서 의미를 가지는지, 상대방(개인이건, 의료체계건, 국민국가건)이 요구하는 젠더를 수용하길 거부하는 사람은 왜 그런지, 수용하는 것 같지만 끊임없이(혹은 간간히) 갈등하는 사람은 어떤 맥락인지, 그런 갈등과 협상은 어떤 맥락에서 발생하는지, 젠더들 간에 발생하는 긴장과 폭력은 어째서이고 젠더마다 동일한 문화적 무게를 지니지 않음은 어째서인지 등을 물을 때 더욱 풍성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08/06/09 21:13 2008/06/09 21:13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의 「다중다색적인 용어정리」중 16~18쪽에서 발췌. 강조는 uGonG.
원래는 『여/성 이론』에 실린 루인의 다른 글을 요약하여 올리려고 했지만 이 발췌 글이 내 고민과 더불어서 현재(혹은 과거에) 이뤄진 모종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올린다.

-------------------------

성전환자, mtf/ftm, 트랜스남성, 트랜스여성, 성전환남성/여성, 여성/남성 성전환자

성전환자들은 각자의 젠더정체화의 과정 속에서 스스로 자신을 사회에서 어떻게 통용시키고 사회적으로 재현할 것인가에 따라 다양한 용어상의 전략으로 재의미화되고 있다. 이는 성전화자들 스스로 자기 전략 속에서 모색된 것이기도 하며, 사회적 담론 내에서 성전환자인권운동의 방향성 속에서 모색된 것이기도 하다.

성전환자를 지칭하는 용어들 가운데 많이 쓰이는 용어 중 하나가 mtf와 ftm이란 용어이다. mtf와 ftm에서 영문 알파벳 f는 female을 뜻하며, m은 male을, t는 to 혹은 toward를 뜻한다. 따라서 ftm는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며, mtf은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mtf와 ftm이란 용어는 실제 전화과정 자체에 초점을 두는 용어로 여성에서 남성으로, 남성에서 여성으로의 전환의 지나 전환과정을 명확히 하는 용어이다. 이는 출생 시 부여받은, 생물학적 기준에 근거한 성과 스스로 성적 표현과 역할 수행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젠더정체성간의 변화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알파벳 t의 의미가 to를 의미할 때와 toward를 의미할 때, mtf/ftm의 의미는 달라진다. male to female을 의미하는 경우가 생물학적 기반에 근거한 성에서 자신이 정체화하는 성으로 “전환 사실”을 모두 보여주는 용어라면, female toward male을 의미하는 경우는 자신이 현재 정체화하고 있는 성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과정”을 강조한다.

반면, 트랜스남성 혹은 트랜스여성이란 용어는 출생 시 부여받은 성과 달리 스스로 정체화하는 젠더정체성에 입각해 남성임, 여성임을 명확히 한다. 남성임, 여성임은 반드시 의학적 조치에 의해서만 귀결되지 않는다. 의학적 조치를 통한 경우(트랜스섹슈얼 남성/여성)뿐 아니라, 의학적 조치가 아닌 다양한 성적 수행을 통해 자신이 남성임/여성임을 드러내는 경우(트랜스젠더 남성/여성)도 모두 트랜스남성과 트랜스여성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또한 트랜스남성/여성이란 용어는 사회 안의 다양한 남성들, 여성들 중 일부로, 장애남성, 흑인여성과 같이 트랜스남성/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용어이기도 하다. 성전환남성과 성전환여성이란 용어도 일정부분 트랜스남성/여성이란 용어와 유사한 맥을 가진다. 성전환이란 용어에서 ‘성’이란 표현은 실제 섹스와 젠더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으로 단지 의학적 조치로 자신의 섹스를 바꾼 경우뿐 아니라 의학적 조치 없이 다양한 젠더실천을 통해 자신이 부여받은 성과 다른 성적 실천을 이행하는 사람들을 모두 이르는 용어이다. 그러나 성전환남성과 성전환여성이란 용어가 ftm과 mtf이란 용어와의 다르게 의미화될 수 있는 지점은 수많은 남성과 여성의 범주 속에 한 남성님, 한 여성임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 성전환자 혹은 남성 성전환자라는 용어는 의학적 용어에서 출발한다. 이는 의학적으로 성전환증을 가지고 있는 여성 혹은 남성이란 뜻으로, 여성 성전환자라고 표현된 경우, 성전환증을 가진 여성을 지칭하며, ftm을 의미한다. 반대로 남성 성전환자라고 표현한 경우, 성전환증을 가진 남성을 지칭한다. 의학적으로 성전환증은 출생 시 부여받은 성에 대해 불편함을 가지며, 부여받은 성과 다른 성으로 살거나, 또 다른 성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 따라 가능한 범위에서 호르몬 치료와 수술을 받고자 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의학적 진단을 통해서 성전환자라는 규정이 부여되는데, 이때 성전환자의 생물학적 기반에 따라 분류된 성에 근거해 여성 성전환자, 남성 성전환자라고 구분한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08/06/07 10:57 2008/06/07 10:57

항상 그렇지만 어떤 글을 나의 어떤 카테고리에 넣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이 글을 공부/페미니즘 게시판에 넣은 이유는, 현재 나는 이 글을 '페미니즘'을 둘러싼 고민 속에서 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동안은 '페미니즘'을 둘러싼 고민 속에서 이 글을 고민할 것이다. 이 때, 내가 무엇을 페미니즘으로 정의하는가를 말해야 한다. 나는 페미니즘은 트랜스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때때로 변하고 있다.

====

출처 http://www.hani.co.kr/section-021003000 ··· 004.html  강조는 퍼온이.


나를 증명할 길은 수술뿐인가

수술을 하건 안하건 난 ‘여성’일 뿐, 트렌스 젠더는 자신의 몸을 혐오해야 하나… 페니스가 있으면 남성이고 질이 있으면 여성이라는 식의 구분·판단 자체가 문제

▣ 루인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 연구활동가

나는 트랜스젠더이다. 꾸미는 걸 좋아하고 색색으로 매니큐어와 페티큐어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나를 낯설게 쳐다본다. 때론 뚫어져라, 공포(혐오)의 눈빛으로 쳐다본다. 재미있다. 언제 폭력이 발생할지 알 수 없는 긴장감에서 생기는 감정들.


내가 바란 몸과 사회가 요구하는 몸

트랜스젠더이지만 수술을 하지 않았고 호르몬 투여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국가 공인 성별로 통하고 커밍아웃을 한 집단에서조차 나를 주민번호의 성별로 대하는 경우가 많다. 아직 의료 과정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현재로선 그럴 의향이 별로 없다.

수술을 고려하지 않거나 욕망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더 마른 몸, 더 예쁜 얼굴, 더 작은 얼굴 크기를 바라는 욕망. 수술과 함께 성형수술을 동시에 고민했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맥락에서 발생한 욕망일까. 이 질문과 함께 수술을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런 욕망이 여성은 이러이러해야 하고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규범과 트랜스젠더는 “이렇다”라는 시선으로 트랜스/여성을 박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바랐던 몸과 한국 사회에서 요구하는 몸 사이의 긴장을 읽으며 수술의 의미는 다르게 다가왔다. 과연 지금의 나는 내 몸을 혐오하는가.

텔레비전이나 언론 등에서 성전환자들을 인터뷰한 글에 주로 등장하는 얘기는 “몸을 혐오한다”는 것. 여성들은 페니스가, 남성들은 젖가슴이 너무 싫다는 얘기들. 맞다. 나 역시 나의 페니스가 ‘싫다’. 하지만 인터뷰 과정에서 어떤 언어로 질문을 구성했고 어떤 맥락에서 이런 말을 했는지 정치하게 읽지 않으면 곤란하다. 나는 내 몸을 혐오하지 않는다. 성기 재구성이나 호르몬 투여를 아주 안 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것이 몸을 혐오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수술을 하건, 하지 않건 상관없이 나는 “여성”이다.

나는 지금 “국가 공인 1번”으로 통하는 몸으로 “2번”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 지금의 몸으로 내가 원하는 성별을 요구하면 안 되는가. ‘성전환자 성별 변경 등에 관한 특별법(안)’은 성별 변경 요건으로 정신과 의사를 포함한 의사 두 명의 인정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의사의 진단과 내 주장이 대치할 때, 의사는 나를 “남자며 성전환증 환자가 아니”라고 진단하고, 나는 나를 “여자며 성전환자”라고 말할 때, 누구의 판단에 따라야 할까. 법안대로 한다면 나는 가짜 트랜스거나 ‘정신병자’일 뿐이다(그런데 성정체성장애(GID)도 정신병 목록에 올라 있다). 법안 공청회 자리에서 발제자와 많은 토론자들이 의사의 판단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의학과 의학적 판단 역시 시대의 맥락에 따른 해석 아닌가. 의사 개개인 역시 사회와의 관계 속에 위치할 때, 갓 태어난 아이를 남자와 여자로 구분하고 “성전환증 환자”임을 판단하는 것 또한 의사의 해석일 뿐이다(어떤 의사는 자신이 매력을 느끼지 않으면 mtf(male to female)가 아니라고 진단하고, 어떤 의사는 상담기간 중 mtf가 치마가 아닌 바지를 입고 왔다고 상담기간을 몇 년 더 연장했고, 한 ftm(female to male)은 자신은 질을 제거하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의사에게 묻자 의사는 그런 ftm은 없다고 대답했다, 또한 수술 뒤 ‘이성애’ 관계를 형성하지 않으면 수술을 거부하기도 한다). 이런 해석(더 정확하게는 의사를 매개로 하는 혹은 의학과 밀월관계에 있는 국민국가의 해석)을 굳이 따를 이유는 없다.


하리수만이 트랜스젠더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나의 목소리를 “수술하지 않겠다는 성전환자도 있는데 너는 왜 굳이 수술을 하려고 하느냐”란 식으로 받아들인다면 이보다 유감스러운 일도 없다. 당신이나 내가 상상하는 성전환자가 전부는 아니다. ‘하리수’만이 트랜스젠더가 아니며, 모든 트랜스젠더가 ‘하리수’와 같은 것도 아니다.

호르몬 투여를 하는 모든 사람이 성전환자는 아니며(어떤 여성은 여성이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남성호르몬을 투여한다), 모든 성전환자가 호르몬 투여를 하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성기 재구성을 하는 모든 사람이 성전환자는 아니며, 모든 성전환자가 성기 재구성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트랜스젠더는 기존의 이성애나 성별 규범을 강화한다는 비난은 불편하다.

트랜스젠더는 기존의 이성애와 성별 규범을 강화한다는 비난(하리수가 등장했을 당시, 이런 비난이 특히 많았고 여전히 많다)은 마치 트랜스젠더든 퀴어든 다 ‘인정’은 하지만 그래도 한마디 훈계하겠다는 태도라고 느낀다. 하지만 그래서 뭐? 트랜스젠더가 젠더를 ‘위반’하기에 성별 규범까지 위반하고 ‘다른’ 식으로 행동할 것이란 인식 혹은 그런 요구는 상당히 문제적이다. 이런 언설들은 트랜스젠더를 지금의 사회구조 바깥에서 사는 ‘완벽한’ 외부자·타자로 설정한다. 하지만 지금의 젠더 사회에서 살며 성별 규범에 자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다. 트랜스젠더는 무언가의 대안이 아니다. 기존의 인식을 흔드는 행위들이 ‘대안’적이지 않으면 쓸모없는 것처럼 여기는 인식이 오히려 성별 규범을 강화할 수 있다.

이런 비난이 불편한 또 다른 이유는 성전환자와 비성전환자의 서로 다른 맥락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전환)남성이 군대에 가고 싶고 갈 수 있으면 꼭 가겠다는 말, (성전환)여성이 ‘여자보다 더 여자답게’ 행동하는 것을 성별 규범의 강화로 받아들이는 건, 매순간 남성임 혹은 여성임을 시험받고 증명해야 하는 상황을 무시하기에 가능하다. (성전환)남성이 조금만 ‘여성스러운’ 행동을 해도 “쟤는 별 수 없이 여자야”란 식으로 반응하고, (성전환)여성이 과잉 여성화할 때에만 “천생 여자”란 말을 하는 상황에서, 이성애나 성별 규범을 더 강화하는 듯한 행동들은 지금의 사회에서 자신을 주장하는 협상력이다.


정신적 성과 육체적 성의 불일치?

흔히 트랜스젠더를 “정신적인 성과 육체적인 성이 불일치하는 사람”이라거나 “남성(여성)의 몸에 갇힌 여성(남성)”이란 식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불일치하는 건 ‘정신적인 성’과 ‘육체적인 성’이 아니라 자신의 몸 해석과 타인의 해석·호명이다. “정신적인 성과 육체적인 성이 불일치”한다는 식의 설명은 젠더 경합(gender dysphoria)을 사회적 맥락과는 무관한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방식이며, 이런 식의 설명이 수술만이 ‘유일한 해결’인 것처럼 상상하게 한다. 나는 지금의 몸으로도 충분히 "여성"이라고 여기지만 끊임없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타인의 시선들로 인해 더 많은 긴장과 갈등을 느낀다. 페니스가 있고 수염이 있으면 남성이고, 질이 있고 젖가슴이 있으면 여성이라는 식의 구분·판단 자체가 문제(question·problem)이다. 여성이면서 페니스가 있으면 왜 안 되고 남성이면서 자궁이 있으면 왜 안 되는지 묻고 싶다. 사실, 계속해서 나를 "여성"이라고 말하지만 "여성" 혹은 트랜스여성/mtf으로 스스로를 부르지 않! 는 편이다. 때론 그런 명명에 불편함을 느낀다. 다만 성별 이분법 사회에서 나를 주장하는 한 방식으로 그런 언어들을 사용할 뿐, 난 트랜스젠더이다. 이런 나에게 수술은 나임을 주장하기 위한 (유일한) 근거가 아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08/02/27 23:31 2008/02/27 2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