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과 해러웨이
from 공 부/미술 2007/12/13 12:55
인터넷에 떠다니는 글인데, 출처는 <월간미술> 2002년 2월호로 추정된다. 저자는 확인되는 대로 올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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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문화와 엘리트 담론 사이의 혼혈아

작가 이불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 미술무대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동시대 한국 미술을 대표적인 작가다.
오는 3월 22일부터 로댕 갤러리에서 열릴 개인전과 2002년 석주미술상 수상을 계기로 이불의 작품세계를 점검해 본다. 199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작품 속에 나타나는 ‘사이보그’ 개념은 그녀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줄 것이다.
 
 
이불이 적어도 지난 7∼8년간 우리 나라 젊은 미술가들 가운데 국제적으로 가장 주목 받는 작가라고 말할 때, 이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90년대 중엽부터 시작된 그녀의 국제적 커리어는, 개인전 몇 가지만 언급하자면, 1997년의 전시 중 미술관 쪽에서 부당하게 일부 작품을 철거한 뉴욕 MoMA전과 1999년 베니스비엔날레 참가와 특별상 수상을 거쳐 금년에는 7회의 개인전이 계획되기에 이르렀고, 그 가운데 6회가 북미 양국의 동·서 도시들과 유럽에서 열린다.


이러한 국내외적으로 ‘성공한’ 이불의 작업에 대한 반응은 비교적 선명하게 찬·반으로 나뉜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중엽까지의 퍼포먼스에 등장한 그녀의 벗은 몸, 번쩍이는 시퀸들, 조야한 원색의 구슬과 조화,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나 SF 영화의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형상들, 음란한 성적 환상을 불러내는 거대한 규모의 풍선과 행위들, 소녀, 특히 유니폼을 입은 소녀를 선호하는 남성의 일탈된 성 취향을 만족시키는 비디오와 그것이 들어 있는 노래방 등은 이불 작업의 외적인 특징들이고, 이들의 출처는 모두 대중문화다.
이러한 요소들은 대중문화에 친숙한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쳐 특히 미술학도들이 이와 유사한 작품을 양산함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소위 ‘신세대 미술’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녀의 미술에 대해 회의적이거나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편의 이유도 무엇보다 이 대중문화적 요소 때문일 것이다. 1990년대 중엽까지, 늦게는 사이보그가 등장한 1997년 이전까지 이불 작품의 주된 특징인 선정성, 직설적 어법, 공공연한 키치적 요소와 고도의 장식성 등이 그녀의 작업에 반대하지는 아니더라도 평가를 유보하려는 사람들에게도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이불 작업의 다른 뿌리 ‘사이보그’ 담론



<화엄(Majestic Spendor)> (부분) 1997년 뉴욕 MoMA 에 설치된 이 작품은 생선이 썩으면서 풍기는 악취로 인해 철거됨으로서 당시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이불의 작업에서 1997∼98년에 처음 등장한 사이보그 개념은 그녀의 작업에 개념상, 조형상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것은 작가 자신에게는 이전 작품들에서 다소 모호했던 이론적 배경을 분명하게 해준 것처럼 보이고, 보는 이에게는 근래 작품을 초기의 작품과 연결시켜 해석할 수 있는 이론적 배경을 구체적으로 제공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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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사이보그 개념은 이미지로는 다양한 출처의 혼합물이지만 이론적으로는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에 아주 가깝다. 그녀 자신도 후자의 ‘선언’ 내용이 자신의 관심거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인간과 기계의 구별을 넘나들고 이성구별을 넘어서는 존재로서의 사이보그’ 개념을 지적했다. 또한 이불은 “페미니스트냐”는 질문에 “1990년대 전반에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은데, 그 이유는 그 단어가 많은 개념을 너무 배제시키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는데, 이것은 해러웨이가 이를테면 ‘흑인 여자’라는 단어가 그 외의 여성을 제외시키기 때문에 그 단어를 쓸 수 없다는 의미와 대동소이하다.

1985년 ‘사이보그 선언’을 쓴 해러웨이는 사이보그를 ‘사이버네틱 유기체’, ‘기계와 유기체의 혼성물’이라 정의했다. 그녀는 인류가 의수족이나 안경과 같은 기계의 도움으로 신체 일부를 대체하고, 사이버 공간에서 정보를 주고받는 것이 일상이된 20세기 말에는 우리 모두가 “이론화되고 조립된 키메라들, 한마디로 사이보그들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녀는 사이보그의 등장을 야기한 세 가지 결정적인 경계들의 와해 - 인간과 동물 사이의, 유기체(인간-동물)와 기계 사이의, 그리고 신체적인 것과 비신체적인 것 사이의 -를 들었다. 이의 구분을 가능케 했던 것은 부권적 사회의 토대가 되었고 그것을 지탱하는 기둥이었던 이원론의 대립항들 가운데 가장 깨뜨릴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에게 사이보그는 이들 사이의 혼성물로서 기존의 이원론, 궁극적으로는 부권적 위계와 지배를 극복할 수 있는 허구이자 실제의 존재로 보였다. 따라서 그것은 포스트젠더 세계의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1988년 이후 최근까지의 이불작업을 기존의 장르 개념으로 분류하기란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 사이보그의 등장과 그 이후의 작업을 위의 해러웨이 ‘선언’과 연결해 그 이전 작품들과 함께 살펴보면, 작업의 지속적인 주제가 각종 대립항을 의식하고 각 작품에서 그것의 결합(해러웨이의 단어로는 coupling)을 시도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대립항들의 성격과 출처는, “탐욕스럽게 책을 읽는다”고 한 작가의 말이 상기될 정도로, 다양하다. 1997년과 1998년 사이에 나온 〈사이보그〉들에서는 특히 해러웨이의 현학적인 담론이 일본 애니메이션과 만화에 나오는 형상들과 결합되었다. 이들의 몸은 전투적이면서도 남성의 관음증을 자극하는 마돈나의 무대의상을 연상시킨다. 그들은 또한 장식이 많은 갑옷과 같은 옷을 입은 천하무적의 여전사이면서도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한 큰 눈을 지닌 ‘저패니메이션’의 캐릭터를 연상시키지만, 그 의상은 예를 들어 할리우드영화 〈배트맨과 로빈〉(1997)의 초인적 힘을 지닌 (남성)사이보그의 것과도 모양과 색이 유사하며, 그것의 연회색 우레탄 ‘피부’색과 우아한 자태는 고대 그리스 조각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이들의 기계적 형태는 2000년에 나온 〈Supernova〉와 그와 유사한 작품들에서는 이전의 유기체적 형태들과 결합하였다. 〈Plexus〉(1997∼98)나 그 외 다색 구슬이 끼워진 철사로 만들어진 작품들에서는 알베르티 이후 20세기 초 프랑스 아카데미에 이르기까지 서양미술에서 엄격히 상하로 나뉘었던 드로잉과 색채가 단일화되었다. 1988년 〈Step by Step, Th-that〉에서 그녀가 입고 퍼포먼스를 했던 ‘옷’, 〈Sargasso〉(1998)나 근래의 〈몬스터〉들에서와 같이, 속에 솜을 넣어 만든 그로테스크한 유기체 형태의 작품에서는 촉각적 끌림이 시각적 거부감과 결합되어 있다.


특히 썩은 생선과 향기가 강한 백합이 나오는 〈Majestic Splendor〉 연작에서는 시각적 끌림이 후각적 거부감과 결합되었다. 1998년의 〈몬스터(흑)〉에서처럼 시퀸과 실리콘으로 번갈아 가며 표피를 처리한 작품들에서는 탈질량감이 질량감과 결합되어 있다. 연성 재료로 되어 있고, 바람을 넣어 크게 만들며, 남성의 성적 기제를 표현하고 있으며, 〈모뉴먼트〉라는 제목을 통해 올덴버그의 〈립스틱〉(1969) 작품을 연상시키는 작품들은 남성의 성적 기제가 여성의 몸, 즉 그 위에 인쇄된 작가 전신상과 결합되어 있다. 또한 이불은 의도적으로 미래의 비전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사이보그를 캐스팅이라는 전통적 조각 방식으로 표현함으로써, 원래의 것과 대안, 미래와 과거의 경계를 없앴다. 전체적으로 그녀의 작품들은, 〈히드라〉와 〈몬스터〉라는 제목이 증거하듯이, 몬스터적이고, ‘하이 아트’인 조각과 ‘로 아트’인 공예의 혼혈아다.

이러한 결합은 경계를 넘나들기이고, 이러한 전략은 의도적이다. 이불은 한 인터뷰에서 “아이러니와 패러디는 그 안에 일종의 지적 게임이 있어서 빠져들게 하는 측면과 절대 빠져들 수 없게 하는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고 이것이 내가 관심을 가진 부분”이라고 얘기했다. 이러한 특징들은, 해러웨이의 단어로는 “사이보그 결합은 지배하는 것이 없고”, “몬스터적이고 비합법적이다”고 표현할 수 있다. 마치 자연과 과학을 결합시켰던 여성들이 바로 그 능력 때문에 자연 정복의 주인이라고 믿었던 남성들에 의해 몬스터적으로 묘사된 마녀로 낙인찍히고 사냥의 대상이 되었듯이 말이다.


낙태, 그리고 사이보그-몬스터의 탄생




<미니 사이보그 (Pale Pink)〉 에폭시 혼합재료 32×33×38cm 2001 Edition 8 of 21
해러웨이를 포함한 사이보그 페미니스트들에 따르면 사이보그는 포스트오이디푸스 세계의 산물로서 더 이상 ‘무죄의 전능한 어머니’가 아니어서 재생산을 담당하지 않는다. 이불은 1989년 연극적 공간 속에서 자신을 거꾸로 매달고 자신의 낙태 경험과 함께 그 ‘죄’를 사한다고 말하는 퍼포먼스를 했다. 이불에게 아기 형상은 1988년 그녀의 첫 개인전이나 그 2년 후의 〈선데이 서울전〉에서 만화처럼 큰 눈에 다리를 꼬고 있는 ‘인형’과 〈모뉴먼트〉를 위한 작가 자신의 사진에서 작가의 양 가슴과 배꼽 부위를 덮은 얼굴 마스크로 나타났다.


작가가 중성적인 사이보그 형상의 등장과 연결해 볼 때 자연적으로 어머니가 되는 것을 인공적으로 거부한 〈낙태〉와 장신구가 된 아기 형상은 매우 시사적이다. 나중에 출현한 사이보그와 연결시켜보면 이것은 남녀의 결합을 통해서 나오지도 않았기에 재생산하지 도 않는, 포스트오이디푸스 세계의 사이보그 개념의 발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의 말에 따르면 그 당시는 자신의 몸이나 몬스터 같은 옷을 페미니즘에서의 여성의 몸으로 읽지 않았고, 따라서 후자에서는 개인의 내부 욕망의 표출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사이보그 이론에 따르면 그것은 부분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성애를 거부하며, 따라서 자웅동체적이고 스스로 복사한다는 것이다. 이불은 이러한 사이보그 개념들을 직설적이거나 패러디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1997년과 1998년에 나온 그녀의 첫 사이보그인 적색과 청색의 실리콘 작품들은 - 〈배트맨과 로빈〉에서 나오는 한 인물에서처럼 - 몸 안의 순환을 돕는 듯한 호스들이 몸의 양쪽 바깥으로 연결되어 있다. 미래주의 조각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1998∼1999년에 나온 일련의 사이보그는 부분들의 조립으로 이루어졌고, 여체 형상을 한 그것들의 몸에는 남성 성기를 암시하는 이미지들이 장식처럼 흩어져 있다. 그녀가 사이보그를 조형한 실리콘은 성형수술을 할 때 쓰이는 것으로, 사람을 사이보그로 만드는 첨단 재료이고, 작가는 그 때문에 실리콘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불은 2000년 사이보그를 신체 부위별로 나누어 도자기로 구움으로써 자신의 실리콘 재료의 우월성을 패러디하고 있다. 한편 1998년에 제작된 12개의 〈Sargasso〉는 솜을 채워 어린 인삼뿌리들이 쌓여 있는 모습으로 만든 작품으로 부분이 떨어져 나가 복사된 사이보그 개념을 상기시킨다.


오리엔탈리즘 코드를 통한 오리엔탈리즘의 무력화 시도




<환영(Apparition)〉(부분)
크리스탈 유리 구슬 폴리우레탄
혼합재료 300×100×150cm 2001
이러한 사이보그의 몸들은 포스트젠더적이다. 따라서 작가는 1999년에도 〈모뉴먼트〉에서 이원론과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이 투사된 자신의 몸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으나, 사이보그 등장 이후, 1990년대 전반 자신의 반라의 사진을 영사기로 비추면서 여자에 대한 속어를 나열하거나(〈Diagramming III〉, 1992), 침대에 벗은 자신의 몸을 묶는 것(〈여성, 그 다름과 힘전〉 1994), 또는 정치·상업적으로 스테레오 타입화된 여자 모습과 소품들을 전시하던 것처럼(〈Technicolor Life〉, 1994) 생물학적 여성의 몸을 정체성 발견의 장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이불은 여류 작가이자 유색인이며 동양인이다. 서구의 이성애자인 백인 남성의 시각에서 보면 이불은 이중적인 타자다. 따라서 이러한 남성 큐레이터들이 이불의 작품에서 서구 백인 이성애자인 남성의 오리엔탈리즘적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요소를 기대할 수도 있다는 것은 추측 가능하다.

특히 가부키 배우처럼 화장한 얼굴, 상투적으로 재현된 설화 속의 선녀(서양에서는 천사) 머리 스타일에 기모노 같은 의상을 입고 몸의 많은 부분을 노출한 자화상 사진(〈모뉴먼트〉)은 이국적인 것에 대한 서구 남성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려는 듯이 보인다. 그 사진이 인쇄된 풍선이 6m에서 12m까지 커짐으로써 남성 관객의 환상은 깨지지만 이불의 이 이미지는, 신디 셔먼이 연출한 사진이나 연극적 초상들처럼, 다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불이 오리엔탈리즘을 인식한 것은 서구로 전시를 하러 나가면서부터이고, 1994년의 〈Alibi〉 연작에서 그것을 표현하려 했다고 한다. 이 연작은 실리콘으로 캐스팅한 인위적인 손과 실제 나비를 결합하고 그 위에 구슬로 장식한 후 전등처럼 빛을 내게 한 것이다. 이불의 설명에 따르면 손은 예술가인 자신의 손이고 나비는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에서 가져온 서양남자에 비친 동양(일본)의 어린 여성을 상징한다. 작가는 서구의 이원론적 사고에서 동양·여성·예술가가 모두 같은 항에 속하고, 그러한 시각이 오리엔탈리즘으로 이어졌음을 정확히 인식하고는 있으나, 그 표현방식이 너무 직설적이고 작위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는 1998년부터 시작된 노래방 연작을 통해서 극복되고 있다. 〈Gravity greater than Velocity〉는 가라오케 캡슐이다. 〈Amateur〉는 일본 소녀를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연출된 유니폼을 입은 소녀들을 담은 비디오 작품으로서 노래방 캡슐 속에 설치되어 사랑의 노래가사가 나오는 모니터에 함께 비친다. 이 오락기구는 동양(일본)의 고안물이지만 오늘날에는 ‘범세계적’인 오락기구가 되어 더 이상 동·서양이라는 이원론의 틀에 맞지 않는다. 유니폼을 입은 일본적 소녀는 현대판 〈나비부인〉으로서, 마찬가지로 동양 여성에 대한 동·서양 남성 모두의 클리셰이다. 여기에서는 이데올로기적 클리셰가 상업적 그것과 만났다. 작가는 남성의 환상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러니와 패러디 상태인 현실”(작가)을 패러디하기 위해서 과장하여 제시한다. 베니스(서양, 다양한 사람들이 지나가는 항구이자 세계적 여행지!)에 처음 등장한 이 캡슐 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다양한 관람객은 실제로 이 공간과 노래부르는 행위가 변태적임을 인식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노래방 작품은 사이보그 세계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러한 전략은 해러웨이의 사이보그론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사이보그는 결국 당파적이고 아이러니적이며 친밀해지고 변태적으로 된다.”

“야당적이며 유토피아적”(해러웨이)인 성격을 지닌 이불의 노래방에 사용된 사이보그 담론의 층들은 2000년대에 등장한 세련된 디자인의 ‘스포츠카’ 안에 노래방 시스템이 장치된 〈Live Forever〉 연작에서는 훨씬 복잡하고 지적으로 변했다. 우선 불활성의 캡슐이 아니라 실제 움직임을 연상시키는 자동차는 인간 다리의 연장으로서 명실공히 인간과 기계가 결합된 사이보그다.


외형의 가벼움과 지리하고 고단한 수공업적 공정의 결합




<Live Forever(Red)〉에서 노래부르는 모습. 혼자 누울 수 있게 장치된 이 노래방에서는 현대인의 자동차에대한 물신주의적 집착에 대한 패러디가 발견된다.
또한 혼자 누울 수 있게 장치된 ‘스포츠카’ 노래방에서는 현대인의 자동차에 대한 물신주의적 집착에 대한 패러디가 발견된다. 많은 할리우드 영화가 보여주었듯이 자동차는 은밀한 성의 장소이고, 많은 시간 거리에 있는 현대인에게는, 온갖 장식과 비싼 오디오 장치가 들어 있는 차는 집의 등가물이다. 특히 땅이 넓은 미국인에게 자동차는 속도감의 상징이다. ‘스포츠카’에서 관객은 1998년의 노래방 제목인 〈속도보다 위대한 중력〉이 아니라 ‘중력보다 위대한 속도’를 꿈꾸지만 차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것은 공학에 대한 맹신과 그것과 유사한, 남성과 서구에 의해 생산되고 그들과 그 외의 범주들에 의해 재생산된 지배자적 사고체계 모두의 전복이다. 이불은 “자신을 타자로서 규정한 세계를 규정하기 위한 도구들의 장악을 바탕으로 생존하기 위해” ‘정복자의 언어’를 통달한 사이보그 페미니스트 문학가들처럼 ‘정복자’의 언어를 ‘읽고 씀’으로써 ‘구전적인 원시인’에 대한 오리엔탈리스트들의 스테레오 타입을 전복시키고 그들 사고의 바탕을 흔든다.

2000년에 제작된 〈Supernova〉,〈Siren〉과〈Chrysalis〉는 1998년에 그린 6점의 드로잉 하나 하나가 삼차원적으로 표현된 것들이다. 이 작품들은 형태상으로는 식물 뿌리 같은 육체적 형태와 조립된 부품 같은 기계적 형태의 혼합물들이다. 이 작품들에는 다른 어떤 작품들 보다 숙달된 그녀의 전통적인 미술기법과 수공업적 능력이 잘 나타나있다.


자동주의 데생처럼 진행되나 자유로운 선과 면을 이루는 선이, 그것들의 밀집과 여백이, 구불거리는 선들과 매끈한 선이 번갈아 나오는 그녀의 먹 드로잉들에서 선은, 그녀가 어렸을 적에 ‘과학자’라고 신봉한 다빈치의 소묘에서처럼 살아 움직이는 것 같고, 섬세한 묘사는 뒤러의 목판화를 연상시킨다. 이 소묘들의 복잡한 선과 면을 그녀는 하나 하나 알루미늄 코일에 폴리우레탄 조각들을 감아 똑같이 삼차원적으로 옮겼다. 이 ‘조각’ 작품들은 어둡게 조명된 공간의 천장에 매달려 마치 허공을 떠다니는 듯한 사이보그-몬스터가 된다.

지극히 세련된 위의 작품들은 어쩌면 전통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환상적인 이 작품들에서는 수공업적 노동, 공예적·장식적 재능, 대중문화적 요소, 최신 엘리트 담론들의 숙지 등, 이불 자신에게 있었던 많은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더욱이 이 작품들에서는 이불이 1994년 나비가 ‘앉아 있는’ 일련의 손 작품에서 피상적으로 표현했던 ‘여자=예술가의 손’이라는 이슈가 포스트부권적이자 포스트오리엔탈리즘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여자와 예술가가 같은 항에 놓이는 것은 부권적 사고의 산물이다. 사이버네틱 세계를 가능케 한 숨은 주역은 컴퓨터 칩을 조립한, 한국을 포함한 동남아 국가들에서 사는 소녀들의 ‘고사리 손’이다. 이것은 첨단공학시대의 식민주의다. 그러나 현대인들을 사이버세계에 ‘빠뜨린’ 이들은 지루하고 고단한 손작업을 한 그들이다. 한국 여성 작가 이불의 손은 정교한 작업을 통해서 현대인들로 하여금 공학의 발전이 만든 유토피아의 하나인 ‘스포츠카’ 노래방에서, 동남아 소녀들의 손처럼, 그것이 디스토피아임을 발견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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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13 12:55 2007/12/13 12:55

박여숙 화랑에서 퍼옵니다. 화랑 홈피에 가면 더 자세한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parkryusookgallery.co.kr/

전시회는 2월 28일까지 진행됩니다. 일요일 오전 10시에 시간되시는 분은 같이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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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새해를 맞아 박여숙 화랑의 전시장을 새로운 하나의 사진공간으로 재구성하는 스테판 칼루자 '립벤트롭씨의 응접실'展을 선보입니다.

예술적 시도를 거듭하는 독일 현대미술가인 스테판 칼루자는 이번 사진 프로젝트를 통하여 역사의 순환구조를 제시하며 우리의 역사의식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각각의 디아섹 사진을 띠 형태로 빈틈없이 연결하고 앤틱가구를 함께 배치하여 하나의 응축된 설치작업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립벤트롭씨의 응접실'은 국제적으로 많은 비평가들과 큐레이터들로부터 가장 주목할 만한 설치작업이라는 찬사를 받은 바 있습니다.

박여숙 화랑에서 한국 최초로 소개하는 그의 이번 개인전은, 평면예술인 사진을 3차원 공간에 끌어들이는 설치작업을 통해 그가 의도한 가상 공간의 체험을 관람자에게 유도하는, 참신하고 괄목할 만한 전시입니다. 희망적인 역사의 르네상스를 떠올리며 미소 짓는 기회를 가지시도록, 스테판 칼루자의 '립벤트롭씨의 응접실'로 변모한 전시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스테판 칼루자의 사진 프로젝트 '립벤트롭씨의 응접실'은 국제적으로 많은 비평가들과 큐레이터들로부터 가장 주목할 만한 설치작업이라는 찬사를 받은 바 있다."

■ 작가 소개


스테판 칼루자(Stephan Kaluza, 1964년 독일 출생)는 독일현대미술계에서 부단한 예술적 시도를 보여주는 작가로서 주목을 받고 있다.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에서 미술사를, 하인리히 하이네 대학에서 철학을 수학한 그는 현재 뒤셀도르프와 베를린에 거주하며, 1995년 첫 개인전 이후 현재까지 독일 전역과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미국과 중국 등 세계 전역에서 활발한 전시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의 작업은 크게 포토리얼리즘 회화작업과 사진 프로젝트로 구분할 수 있는데, 특히 그의 사진 프로젝트들은 기념비적 성격을 지닌다. 실제로는 한 눈에 담을 수 없는 형이하학적인 대상들-강, 섬, 육지-의 변화 또는 형이상학적인 역사적 사건의 전개 등을 시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사진들을 수평으로 압축하여 길게 일렬로 배열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일례로 그는 알프스산에서 라인강을 따라 산기슭을 직접 내려오며 촬영하는 사진 프로젝트 전시와 출판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촬영된 사진들은 70,000컷에 달하기도 한다. 이번 '립벤트롭씨의 응접실'처럼 역사적 사건의 전개를 다룬 프로젝트에서는 각각의 사진들을 수평으로 압축된 하나의 사진으로 재구성하여 띠처럼 연속적으로 설치하는 예술적 진술방식을 통해 근현대사를 재해석해낸다.




■ 립벤트롭씨의 응접실

사진프로젝트 'Ribbentrops Wohnzimmer'는 역사적 사건들의 메커니즘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디지털 사진 촬영법의 새로운 발달로 최근 들어서야 가능해진 색다른 사진적 개념을 활용하고 있다. 작가는 역사의 악순환적 메커니즘을 대표하는 공간으로서 립벤트롭씨의 응접실 을 차용하여 재현해낸다. 그 상징성을 체험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당시 있었음 직한 실내 가구들을 전시장에 설치하고, 혁명적 변화의 순환구조를 연출한 전체 66m 길이에 달하는 사진연작을 전시장 벽면에 띠 형식으로 빈틈없이 설치하여,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하나의 공간을 생성해낸다. 지배층의 탄생에서부터 멸망, 그리고 유사계층의 재탄생이라는 플롯 의 사진연작에서 그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결과적으로 서로 동일하여, 역사의 닫힌 순환구조를 의식하게 한다. 함축적인 화면구성을 보이는 각각의 사진은 연극적인 세트에 인위적으로 배치된 인물들이 펼치는 퍼포먼스 스틸사진 같지만, 그 156컷의 사진들이 전체로서 연결되어 하나의 설치작품이 됨으로써 비로소 강렬한 서사성을 표출한다. 즉 사진예술을 위한 사진이라는 개념을 넘어선 전체의 설치작업으로서, 역사적 관계를 재구성해보는 사진 프로젝트 립벤트롭씨의 응접실은 포토몽타쥬를 일직선으로 읽어나가는 하나의 체험적 공간이다.




■ 전시 의미와 취지

한국에서 최초로 소개되는 스테판 칼루자 작품전은 평면예술인 사진을 3차원 공간에 끌어들이는 설치작업을 통하여 결국 작가가 의도한 가상공간의 체험을 관람객에게 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참신하고 괄목할 만한 전시라고 할 수 있다. 박여숙 화랑은 이번에 스테판 칼루자를 직접 초청하여 더욱 한국 관람객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재구성된 역사의 현장에서 작가는 수레바퀴 같은 역사의 패턴이 휴머니즘이 배제된 채 인간 존엄성을 높이는데 이바지하지 않았다고 폭로하고 있다. 하지만, 립벤트롭씨의 응접실에서 역사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바로 관람자들의 몫이다. 현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어쩌면 역사적 습득의 결과는 아닐는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립벤트롭씨의 응접실로 대표되는 역사상 우연적이고 동시적으로 전개된 사건들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면, 20세기 역사와 오늘날의 사회가 얼마나 달라졌을 것인가? 작가는 일견 역사가 불가피하게 닫힌 순환구조라고 회의하는 것 같지만 기실 역설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좌우해나가야 할 역사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새해의 벽두, 립벤트롭씨 응접실에서 모두가 희망이라는 답을 뇌리에 떠올리며 미소 지을 수 있는 전시가 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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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2 22:40 2007/02/22 22:40
아래 소개 이외 이 전시회에 대한 context 는 전혀 모른다. 단지, 행사명에 나온 것처럼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작가들의 작품과 고민이 어디에 놓여져 있고,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고 싶을 뿐이다.

“ Spring” - The new contemporary Artworks Festi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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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1 12:47 2007/02/21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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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서 스스로 고민을 지속할 적절한 문제의식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문제의식을 차근차근 정리하며 고민할 수 있는 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서점에 가서 몇 권의 책을 뒤적이다 이름도 딱 입문서 같이 나온 W. 타타르키비츠의 『미학의 기본 개념사』를 구입했다. 타타르키비츠는 폴란드 바르샤바 출신으로 1886년에 태어나서 1980년에 죽었다.

이 책의 원제는 A History of Six Ideas: An Essay in Aesthetics 이다. ‘여섯 가지 개념의 역사: 미학에 관한 에세이’ 정도 되겠다. 타타르키비츠는 이 책이 자신의 『미학사History of Aesthetics』라는 책과 짝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필자가 이 책보다 먼저 썼던 『미학사』는 인물들의 역사, 즉 지나간 시대에 미, 예술, 형식, 창조성 등에 관해 논했던 집필자와 예술가들의 역사였다. 이 책은[『미학의 기본 개념사』] ...... 미학적 문제, 개념, 이론들의 역사를 다루는 것이다.” 『미학사』는 총 3권으로 한국에는 2권까지 번역되어있다. 1권이 2005년에, 2권이 2006년에 나온 것으로 봐서는 3권은 2007년인 올해에 나올 것으로 기대해도 될지 모르겠다.

현재 『미학의 기본 개념사』 ‘서론’과 ‘1장 예술: 개념의 역사’까지 읽었는데 아주 흥미롭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강의하듯이 써진 덕에 호흡이 끊어지지 않고 읽을 수 있어 글 읽는 맛이 나서 좋다. 내가 흥미로웠던 부분은 현재(2차 대전 이후를 말하는 듯 하다)의 상황을 ‘승리한 아방가르드의 시기’로 규정한 곳이었다.

“1차대전 이후, 특히 2차대전 이후 아방가르드는 승리를 거두었다. 사람들은 인습을 파괴하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을 추종하여 명사 대접을 하고 특별 대우를 하였다. 보수적인 예술가들은 수세에 몰렸고 아방가르드를 모방함으로써 간신히 구제받았다. 그 이후로는 아방가르드만이 어엿한 예술로 대접받았다. 투쟁적인 아방가르드[”자유라는 것이 예술에서 허용되는 정도라 아니라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아방가르드]를 모더니즘으로 이를붙인다면, 양차대전 이후에 시작되는 시기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어떠한 아방가르드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은 아방가르드밖에 없기 때문이다.”(64쪽)

이 아방가르드 중에서도 “가장 큰 새로움”은 초현실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전적으로 창조성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것만이 중요할 뿐, 창조성으로 제작된 대상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을 타타르키비츠는 “예술작품 없는 예술-이것은 이론상의 변화일 뿐만 아니라 예술 개념 자체의 변화이다.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것을 탐욕스럽게 갈망하는 시대에 나타난 가장 큰 새로움 것이다.”라고 평한다. 이것은 ‘예술’에 대한 공격일 뿐만 아니라 예술을 제거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타타르키비츠가 이러한 예술 개념에 동의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예술은 본성적으로 자유의 한 영역이며 여러 가지 형식을 취할 수 있다. ...... 그러나 예술은 제한된 범위의 자유이다. 말하자면 형식의 구성, 사물의 모방, 경험의 표현 등을 구체적인 작품 속에 실현시키는 한도 내에서의 자유인 것이다. 실현되지 않는 고안 자체는 예술이 아니다. 또 예술은 ‘스스로 주목을 끌 수 있는 그런 것’도 아니다. 만약 그런 것을 예술이라고 이름붙인다 하더라도, 그 표현만 있을 뿐 개념은 보존되지 않을 것이다.”(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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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타타르키비츠

이것은 아방가르드에 대한 거부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타타르키비츠는 ‘아트 어택Art Attack’이라는 아방가르드의 기본 전략을 의문시 하는 듯 하다. 그는 “예술의 개념과 관례가 몇몇 아방가르드의 지침에 순종하여 소멸한다손 치더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노래하고 나무에 형상을 새기며 자신들이 본 것을 모방하고 형태를 구성하며 자신들의 감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를 계속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일상의 모방과 표현’ 쪽에 좀 더 손을 들어주는 듯 하다. 일상적 삶에서의 모방과 표현. 이것은 일반적인 ‘모방’과 ‘표현’이라는 말과 조금 거리감이 있는 듯 하면서도 가까운 듯 느껴진다. 이것은 이 책을 읽으며 차차 좀 더 확인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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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2 00:48 2007/02/02 00:48
뒤늦게 미술에 관심을 갖다 보니 지난 간 전시회를 보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다. 그 중에서 제라르 프로망제 전은 몇 년 안에 다시 할 것 같지 않다는 점, 2005년 개최한 전시회가 특별히 기획된 전시회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2005년 11월 5일~2006년 1월 5일까지 전시회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프로망제 소개]

2005년과 2006년은 제라르 프로망제에게 대단한 해가 될 것이다. 그를 위한 여섯 번의 전시가 <회고전 1962-2005>의 형식으로 프랑스와 해외를 순회한다. 올 봄에 이미 롱스 르 소니에에 위치한 돌 미술관에서 전시를 마쳤고 11월 서울의 국립현대미술관 순회를 앞두고(이어 2006년에는 뤽상부르크, 쿠바의 하바나, 프랑스의 루비에, 에브로에서 전시가 이어질 예정이다.) 이번 여름에 라 센느 쉬르 메르의 빌라 타마리스 아트센터에서도 같은 전시가 개최되었다(9월 18일까지). - <리베라시옹>과의 인터뷰에서 [전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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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르 프로망제Gérard Fromanger, 1939 ~




프로망제를 알고 싶은 사람에게 링크한 인터뷰를 일독하길 권한다. 인터뷰에서 인상적인 구절을 몇 군데 따오면,

저는 모든 색에 동등한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각각의 작품 속에 온갖 색들이 모두 등장합니다. 물론 지배적인 하나의 색이 있고 몇몇 색들은 눈에 잘 띠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푸른 클라인(클라인의 파란색)”, “푸른 모노리(모노리의 파란색)”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떤 색에 특별하게 집착하여 빠져있지는 않습니다. 저의 작업에서 색들은 모두 시민권, 생존권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서로 투쟁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색들이 마치 사람처럼 인격을 부여받는 것이죠.
최근에 저는 존 포드(John Ford)의 영화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My Darling Clementine>을 다시 보았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꾸며내지 않고 그저 현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현실은 모든 계층과 비열함, 전쟁, 만취한 술꾼, 배신, 승리한 또는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마피아, 총격, 범죄 등과 함께 합니다. 최고의 작품이죠. 그는 현실로 유토피아를 만듭니다. 그는 관념론자들처럼 자신의 유토피아가 실제로 도래할 것이라고 하지 않고 현실을 유토피아로 바꾸어 놓는다고 말합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창조의 장은 새로운 저항의 장입니다. 미술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그냥 작은 술집의 대화 속에서 변화하고 있는 것이죠. 보르헤스(Borges)는 사막에서 손에 모래를 한 줌 쥐어 왼쪽에 뿌리고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저는 방금 사하라 사막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가 이렇습니다. 미술가들은 한 줌의 모래로 사하라 사막을 바꾸어 놓습니다.





제라르 프로망제 전에 대해서는 기사가 있으며, 기사를 통해 몇 개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물론 구글, 야후에서 검색해도 작품을 볼 수 있다. 실제 보긴 힘드니 이렇게라도 아쉬움을 달래자.

권위주의를 무너뜨린 혁명예술가 프로망제

'68혁명' 기화로 '신구상' 깃발 올리고


프로망제의 작품은 프랑스어 잡지 mutitudes 1호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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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4 23:01 2007/01/04 23:01



전시 소개글 중 일부를 따오면,

디자이너가 아닌 이들의 디자인 전시.

그래서 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면면은 굉장히 다양하다. <기계비평>이라는 책을 출간하여 기계문명을 바라보는 인문학자의 시선을 보여주는 사진평론가 이영준, <근대의 책읽기>,<끝나지 않는 신드롬>,<혁명과 웃음>(공저) 등 문제작들을 잇달아 내놓아 주목받고 있는 문화 연구자 천정환, 과거 동성애자 인권운동가로 활동했던 예술비평가 임근준, 유럽을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명성을 얻고 있는 아티스트 양혜규, 평택 대추리에 ‘위장전입’한 후,  사진관을 열어 미군기지 이전으로 인해 뿔뿔히 흩어질 대추리 사람들의 기념사진을 찍어 주는 작업으로 유명한 다큐멘터리 사진가 노순택 등이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정치’, 혹은 ‘정치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자신의 매체를 통해 직접적으로 발언하고 있다. 

물론 <한국생활사박물관>으로 2004년 백상예술대상 편집부문 대상을 수상한 편집디자이너 김영철과 세로쓰기 글씨체 ‘꽃길’을 비롯하여 90여개의 한글 폰트를 디자인한것으로 유명한 글자 디자이너 이용제, 분당의 대안학교인  <이우학교> 프로젝트에서 학교에서 사용되는 모든 것들을 좀더 아름답고 편안하게, 그리고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디자인해서 화제를 모았던 이정혜 등굵직굵직한 젊은 디자이너들의 작품들 역시 눈길을 끌고 있다. 

또한 디자인사회연구소장 권혁수, 공공미술추진위원회 상임위원 겸 사무국장 최범  등 우리 디자인계의 ‘원로’들도, 정치와 디자인의 관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모색하는 작업을 보여준다. [전문보기]
흥미진진한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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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30 17:41 2006/12/30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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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에게 철학은 뭘까? 그리고 예술과 철학의 관계는?


아도르노가 지적했듯이 현대의 예술은 철학과 상보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다. 오늘날의 전시회 카탈로그에서 작품의 빈약성과 철학의 풍성함을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늘날 비평은 작품 이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성립 자체에 참여한다. 과거에는 어떤 대상이 작품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기준이 작품 밖에 미리 존재했지만, 오늘날 예술은 자신을 예술을 만들어주는 정의를 자기 안에 품고 나와야 한다. 뒤샹이 소변기로 만들어낸 것은 바로 이 새로운 예술의 정의이다. 오늘날 예술에 '주제'라는 게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왜 예술인가'하는 것이리라. 이 자기 정체성self-referentiality 때문에 오늘날 예술은 비평에 결정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이 때문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 철학과 밀접한 공모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진중권의 들뢰즈의『감각의 논리』독해 중에서.

베이컨의 회화는 이 보이지 않는 힘을 가시화하는 가운데 시간성을 내포하게 된다. 회화는 전통적으로 공간예술에 속했으나, 베이컨의 그림은 이처럼 리듬을 묘사함으로써 시간예술에 근접한다.



『감각의 논리』를 읽기 위한 짤막한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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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30 00:40 2006/12/30 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