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말 마음에 쏙 드는 아이디어닷. 마포촛불연대 겨울나기 준비를 위한 '울트라캡숑 좋은 아이디어'! 앞으로 자전거란 이름에 의미가 한 가지 더 추가되어야 겠다. '자전거' - '자기가 전기를 생산하는 거'(내맘대로 작명을 다시 했다.) 아쉬운 것은 내가 이 날 못간다는 거;; - uGonG우공
========== 전기세 0원에 도전한다 / 돕
마포촛불과 길바닥평화행동을 하면서 길거리에서 노래하고, 영상을 보고, 전기로 불을 밝혀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항상 그 전기가 필요했다.
전기는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근처 화장실이나 또는 전기를 끌어올 곳이 있으면 그냥 쓰곤 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석유를 채운 발전기를 돌려야 했다.
그리고 매주 행동을 하다보면 어느새 발전기 석유가 동이 나버려서 노래를 하다가 갑자기 앰프가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석유 없이 전기를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했다.
기존의 체제는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그래서 대안이 필요하고, 그 대안을 추구하는 모임을 한다면 모든 것이 대안적으로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자전거를 돌려서 전기를 생산하고, 그 전기로 앰프를 켜서 노래를 부르고 기타를 치고 영화를 볼 수 있으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태양에너지든 풍력이든 자전거든 대안에너지로 돌아가는 대안행동이면 그 자체로 신나고 의미가 있다.
이런 실험은 이미 많은 곳에서 벌어져왔다.
2007년 여름에 새만금 갯벌에서 열렸던 살살페스티발도 역시 그런 문제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자전거 발전기로 생산한 전기를 통해 함께 여름밤 갯벌에 누워 영화를 보는 풍경을 그리며 우리는 손수 자전거 발전기를 제작했었다.
* 자전거 바퀴가 돌아가며 전기가 생산이 되면 이 장치를 통해 배터리에 전기가 모이게 된다. 태양열판이 있으면 역시 이 장치에 연결을 해서 전기를 배터리에 모을 수 있다. 페달을 돌리면 불이 반짝이며 전기가 모이는 과정이 눈에 보인다.
* 이것에 생산된 전기는 아래 보이는 두 개의 배터리에 담긴다. 엄청나게 무거운 배터리에 전기가 모이고 있다.
* 이렇게 모인 전기는 인버터를 통해 직접 우리가 플러그를 꽂아 쓸 수 있게 된다. 불이 들어와 현재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전력이 적어서 전기가 부족할 경우에는 빨간색 불이 들어오면서 소리가 난다. 이럴 때는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돌려주면 곧 다시 전기가 모인다.
오늘 피자매연대 사무실에 가져온 자전거 발전기로 전기를 생산한 다음 그것으로 커피를 타서 마셨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글들을 읽어보면 이들의 입장을 더 분명히 알 수 있겠다. 다양한 분석들이 나오는 것과 함께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오늘을 사는 것과 현 위기(공황)를 이해하는 것. 이것은 결코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며, 눈 밝게 귀 기울이고 고민하고 행동해야 할 때이다. (우공)
촘스키·월러스틴·지젝 등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왔던 지식인이 현 경제위기에 대한 분석과 대안을 쏟아내고 있다. 이들은 자유·행복 추구의 평등한 권리를 외쳐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59호] 2008년 10월 27일 (월) 11:28:47
윤재설 (자유 기고가)
ⓒReuters=Newsis
지난 3월 반세계화 운동 단체인 ‘Attac’(국제금융거래과세연합) 회원들이 리히텐슈타인의 수도 파두츠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누구는 ‘금융의 대량살상무기’ 파생금융상품이 문제라고 했다. 뉴욕 타임스·워싱턴 포스트 등 미국의 유수 언론은 파생상품 규제에 반대했던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연준) 의장을 원흉으로 지목했다.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 아서 레빗 전 증권거래위원회 위원장의 이름도 나왔다.
부시 행정부의 구제금융안을 놓고는 우파 일각에서 ‘사회주의적’이라거나 ‘큰 정부로의 회귀’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심지어는 그동안의 정부 개입이 이같은 사태를 초래했다며 이참에 시장에 대한 정부 규제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를 놓고 미국 내에서는 물론이고 세계 각국의 지식인들이 갖가지 분석을 내놓았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왔던 좌파 지식인도 예외는 아니다.
이들은 부동산 거품이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 아니라 그동안 금융자유화와 규제 완화라는 이름 아래 진행돼온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현 경제위기의 근본 원인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월스트리트에 세금을 쏟아부을 것이 아니라 노동자와 소상공인의 일상 공간인 메인스트리트를 구제하라고 주장한다.
노엄 촘스키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명예교수는 위기의 직접 원인이 부동산 거품의 붕괴에 있는 것은 맞지만 그 뿌리는 지난 30년 동안 진행된 ‘금융자유화의 승리’에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금융자유화 조처로 막대한 이익을 본 금융기관이 이제는 국가 개입을 요구하고 있다며 월가의 이중적인 태도를 비판했다.
촘스키는 최근의 경제위기를 신자유주의나 자본주의의 종말과 연결 짓는 조셉 스티글리츠 컬럼비아 대학 교수나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서는 “자본주의가 시작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끝날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지금의 자본주의는 그냥 자본주의가 아니라 ‘국가 자본주의’이며, 미국의 경제 역시 국가에 크게 의존한다. 따라서 시장 근본주의가 추동한 금융자유화는 한 시대를 마감하겠지만 국가 자본주의 자체는 전혀 위협받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미국 제국 몰락의 징후인가
반면 하워드 진 미국 보스턴 대학 명예교수는 현재의 경제위기에 대해 “미국 제국의 몰락으로 향하는
ⓒ뉴시스
이매뉴얼 월러스틴
길목에 있는 주요 중간역”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지난 10월2일 영국의 일간 가디언 웹사이트에 올린 글을 통해 2001년 9·11사태가 미국 제국 몰락의 첫 번째 징후라면 “무능과 탐욕이라는 두 가지 특징으로 유명한 거대 금융기관들에 납세자들이 낸 세금 7000억 달러를 쏟아붓기로 (공화·민주) 양대 정당이 서둘러 합의한 것”이 또 다른 징후라고 지적했다.
세계체제론을 주장해온 이매뉴얼 월러스틴 예일 대학 석좌교수는 지금의 경제위기가 단순한 경기침체(recession)가 아니라 전세계적 불황(depression)의 시작이라고 단언한다. 장기적인 수준에서 자본주의의 위기를 논해온 월러스틴은 10월15일 미국 빙햄턴 대학 페르낭브로델센터 홈페이지에 올린 논평을 통해 파생상품이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석유 투기세력을 위기의 주범으로 지목하는 것은 ‘책임 떠넘기기’이며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월러스틴은 현재의 불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여러 저서에서 펴온 논리대로 장기적 수준의 헤게모니 주기와 중기적 수준의 콘트라티예프(경기 사이클) 파동에 주목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먼저 장기적인 헤게모니 주기를 보면 미국은 1873년 영국에 대항하는 국가로 떠오른 뒤 1945년 헤게모니를 완전히 구축했고, 1970년대 이후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월러스틴은, 미국의 헤게모니는 부시 대통령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추락의 속도가 급격히 빨라졌으며 미국이 여전히 강대국이지만 수십 년 안에 힘이 약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새 질서는 좋은 것일 수도, 나쁜 것일 수도
콘드라티예프 파동은 이와 좀 다른데 세계경제는 1945년 이후 기록적인 호황 국면을 이어가 1967~1973년 최정점을 찍은 후 하향세로 돌아섰다. 하지만 이 하향세는 그전과 달리 오래 지속되어왔다. 미국 재무부와 연방준비이사회, 국제통화기금(IMF), 유럽과 일본의 협력자들이 주기적으로 시장에 개입했기 때문이라는 게 월러스틴의 설명이다.
1987년 주가 폭락, 1989년 저축대부조합 파산,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 1998년 롱텀캐피탈매니지먼트 사태, 2001~2002년 엔론 사태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은 세계경제를 지탱하기 위해 시장에 개입했고 그 덕분(?)에 콘트라티예프 하강 국면이 길어졌을 뿐이다. 월러스틴은 하지만 이같은 개입에는 본질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결국 지금 그 한계에 도달했다고 지적한다.
ⓒFlickr
슬라보예 지젝
월러스틴의 전망은 낙관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다. “현재의 체제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것을 대체할 새 질서는 무수한 개별 투쟁의 결과일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질서인지를 예측할 수는 없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는 아닐 것이지만 양극화되고 위계적인 더 나쁜 것일 수도 있고, 비교적 민주적이고 평등한 더 좋은 것일 수 있다. 새로운 체제를 선택하는 것이 지금 시기 지구적 차원에 벌어지는 주요 정치투쟁이다.”
미국의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먼슬리 리뷰> 편집장인 존 벨라미 포스터는 더 급진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포스터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역사상 극심한 위기 중 하나에 직면했다. 대공황 이후 자본주의 세계에서 이렇게 나쁜 적이 없었다”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 위기는 “금융시장에 돈을 쏟아붓거나 금리를 낮춘다고 해결될 수 있는 유동성 위기가 아니며 ‘미국식’ ‘자유시장’ 금융자본주의 모델의 총체적인 몰락의 징조이다”라고 평가한다. 부자들 도와주는 게 사회주의?
그는 또 미국과 유럽의 은행 국유화를 사회주의나 급진주의로 혼돈해서는 안 되며 그것은 단지 “전면적인 부채 디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취한 임시 조처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포스터는 지금의 경제위기에 따른 고통이 온전히 노동자 계급의 몫일 수밖에 없으며 좌파는 “고장난 체제를 수리하려 들 게 아니라 경제 피라미드의 맨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비판도 흥미롭다. 지젝은 <런던서평> 웹사이트에 기고한 글을 통해 부시 미국 대통령이 2001년 9·11 직후와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미국민에게 한 연설에서 공통점을 끄집어낸다. 부시 대통령이 두 연설에서 모두 미국적 삶의 방식에 대한 위협, 그리고 위험에 대처하기 위한 신속하고도 단호한 행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지젝은 또한 부시 대통령이 미국적 가치―9·11 당시에는 개인의 자유 보장, 지금은 시장 자본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바로 그 가치들을 부분적으로 보류할 것을 미국 국민에게 요구했다고 지적했다.
구
ⓒFlickr
노엄 촘스키
제금융안을 놓고 벌어진 ‘사회주의’ 논란에 대해 지젝은 “금융구제안이 정말로 ‘사회주의적’인 조처라면 아주 기발한 것”인데 “왜냐하면 가난한 이들이 아니라 부자들을, 돈을 빌리는 쪽이 아니라 빌려주는 쪽을 도와주는 것이 목적인 ‘사회주의적’ 조처이기 때문”이라며 코웃음을 쳤다. 그는 “자본주의를 수호하는 데 복무한다면 ‘사회주의’도 괜찮다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덧붙였다.
지젝은 국가의 개입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현재 금융위기마저도 사실은 국가 개입의 산물이라고 지적했다. 2001년 닷컴 버블 붕괴에 대한 대책으로 금리를 내려 부동산으로 자금을 끌어들인 결과 현재의 금융위기가 왔다는 것이다. 그가 든 아프리카 말리의 예는 자유시장의 실체를 잘 보여준다. 말리에서는 면화 재배와 축산업이 가장 규모가 컸는데 서구 열강이 자신들은 지키지 않는 규칙을 강요하는 바람에 두 산업 모두 위기에 처해 있다. 미국 정부는 자국 면화재배 농가를 보호하는 데 말리의 1년 국가예산보다 많은 돈을 지출하고, 유럽연합은 또 1년에 소 한 마리당 500유로의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젝이 여기서 강조하고자 한 것은 시장은 전혀 중립적이지 않으며 항상 정치적 결정에 의해 규제받는다는 것이다. 그는 “진짜 딜레마는 ‘국가 개입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국가 개입이냐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그가 보기에 이것이야말로 진짜 정치, 즉 우리 삶을 지배하는 조건을 규정하는 투쟁이다. 지젝은 금융구제안을 놓고 벌이는 토론은 우리의 사회적·경제적 삶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며 “이제 행동을 할 게 아니라 말을 해야 한다”라고 했다.
하워드 진도 ‘자유시장’이라는 환상을 깨뜨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한 번도 자유시장을 가져본 적이 없고 정부의 개입은 항상 있어왔다는 것이다. 그는 “7000억 달러를 부실 금융기관에 지원할 것이 아니라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직접 주는 것이 대안이다”라며 주택 소유자가 모기지론을 갚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연방 고용 프로그램을 만들어 일자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올해 86세인 노장 역사학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독립선언문이 약속한 것, 바로 만인의 생명·자유·행복 추구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정부의 책임이라는 것을 선동하고 조직하라. 그런 과감한 접근만이 미국을, 제국이 아닌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미국을 지킬 수 있다.”
다중지성의 정원(클릭)에서 10월 16일부터 시작된 조정환 선생님의 [제국 시대와 촛불봉기] 1강 강의메모입니다. 첫 시간에는 현재의 미국발금융위기와 촛불의 관계를 분석했습니다. 10월 23일 2강에는 미국발금융위기 속에서의 한국상황과 촛불의 관계를 분석합니다.
2008년 10월 16일 목요일 [제국 시대와 촛불봉기] 1강 강의메모
1. Subprime + r = subprimer = proletariat 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상황이란 Subprimer=proletariat 에게 대출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나. 지난 신자유주의 30년이 만들어낸 집단
2. 금융위기를 과학적 시각으로 분석하려는 것이 지금의 일반적인 시선이다. 현재의 위기의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제학적 분석을 이해하고 넘어 삶정치적인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금융위기의 다중의 삶정치적 이해, 그것은 subprimer의 시선에서 봐야 한다. 가난한 subprimer가 돈을 갚지 못함으로써 위기가 시작되고 있다.
3. 은행 가. 상업은행: 00은행 등, 예금-대출의 차액이 주요 수입원. 나. 저축은행: 00신용은행, 00저축은행 등. 다.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 등. 수수료가 주요 수입원. → 최근 미국발금융위기의 핵심문제. 1) 모기지 전문회사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의 경우.
8. 현 미국발금융위기의 발생의 매커니즘 가. Subprimer↔상업은행→투자은행A→투자은행B.......보험회사→국가 : 이 과정은 맑스는 의제자본(fictive Capital)이라 개념으로 분석한다. 1) Subprimer : 신자유주의에서 생산된 집단으로 대출을 통해 생활비, 주택자금을 마련한다. 2) 상업은행→투자은행A: 부동채권의 유동화.=MBS 3) 투자은행A→투자은행B: 채권을 여러 개로 묶고, pooling하여 증권화함=CDO 4) 상업은행→투자은행A→투자은행B : 부채의 증권화. 5) Subprimer↔상업은행-투자은행A-투자은행B : ‘위험’의 증폭됨=증권화의 파생적 증폭. 6) 보험 : ‘위험’의 증폭과정을 ‘보험’으로 보장한다고 함.=위험의 보험화. 7) 국가 : 미국은 구제금융을 하겠다고 함. 나. 이 과정은 전지구적으로 확장됨: 타국에서 미국 채권을 구입함.
9. 미국에서 계속 채권을 발행할 수 있는 이유는 발권의 특권, 즉 미국의 화폐주조권(seigniorage; 화폐주조세, 군주의 특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달러환류와 발권이 균형적으로 유지되어야 미국 경제가 유지된다.
10. 미국이 군주국으로 지위를 차지할 수 있는 이유는 전쟁, 화폐, 정보의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현재 화폐 헤게모니가 위기에 처해있다.
11. 10월 8일 각국이 금리인하(한국도 곧 했음)를 하고 이것은 인플레를 불러오고, 물가가 오르고, 노동자들의 삶이 팍팍해짐.
12. 골드만삭스 등의 투자은행은 유가, 식량 등 에너지에 투자를 해서 차액을 가져가려고 함. 이것은 1990년대 IT투자, 2000년대 초 주택, 2006년부터는 에너지 등으로 이어졌는고, 이것을 점차 삶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들이다.
13. 최근엔 신흥시장 연쇄부도 위험도가 상승하며 연쇄부도 가능성이 높아짐.
14. 은행의 국유화, 은행자본의 국유화: 우선주를 매입하여 배당금을 받겠다는 것이다.
15. 다중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미국발금융위기 가. 생산에서의 노동의 협력화(노동자 상호신용을 통한 협력노동화)가 자본이 재현한 현재의 신용(credit)이다. 나. 인간 사이의 협력적 신용형태를 금융기관에 의해서 매개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자기신용’의 관점에서 신용을 창조하는가가 다중의 과제이다.
16. 질문 가. 유럽, 중국, 자본주의 전위들의 현재 대안은 무엇인가? : 달러태환의 중지의 미국 달러의 군주적 예외권력을 갖게 해주었다. 하지만 사빠띠스따 투쟁, 유럽의 공공부문 투쟁, 1999 시애틀 투쟁, 2003년 반전 투쟁 등과 2001년 9.11 테러 등으로 미국의 달러의 헤게모니가 양화되었다. 이 위기를 연기하는 자본의 대안이 서브프라임 모기지류의 길이었다. 고든 브라운의 은행 국유화. 케인즈주의로의 회귀. 1930년대 브레튼우즈 체제와의 성립과는 달리 미국 중심의 국가경제 협력은 현재는 불가능하다. 다양한 부르주아 언론에서 국유화가 대안인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신브레튼우즈 체제가 자본의 대안이라는 주장은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강하다. 이 위기를 대면하고 이 위기 속에서 다중의 새로운 질서를 창출해야 한다.
17. 10월 23일 2강을 준비하기 위한 참고자료. 가. 이일영, 「촛불의 경제학」, 『창작과비평 2008 가을호』 나. 박영균, 「촛불의 정치경제학적 배경과 정치학적 미래」, 『진보평론 2008 가을호』
▶『제국』과 『다중』의 공저자 마이클 하트가 알기 쉽게 쓴 안또니오 네그리 사상의 정수! ▶『제국』과 『다중』의 사상적 기원을 밝힌 책! ▶스피노자, 맑스, 레닌, 그람시, 푸꼬, 들뢰즈 등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 시대의 지성! ▶‘아고라 촛불 시대’, ‘집단지성·다중지성 시대’에 맞는 새로운 네트워크 조직화론에 대한 탐구!
◎지은이: 마이클 하트 ◎옮긴이 : 정남영 박서현 ◎출판일: 2008년 10월 30일 ◎판형: 사륙판 양장본(127×188) ◎쪽수: 236쪽 ◎정가: 16,900원 ◎출판사: 도서출판 갈무리 ◎ISBN 978-89-6195-008-4 04300 / 978-89-6195-003-9 (세트) ◎도서분류 : 아우또노미아총서16
1. 『네그리 사상의 진화』가 말하는 안또니오 네그리
안또니오 네그리, 『제국』과 『다중』으로 전 세계 지성계를 뒤흔든 정치철학자! 새로운 세기를 준비하는 2000년 안또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공동저술한 『제국』(Empire)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전 세계 좌우파로부터 뜨거운 논란거리가 되었다. 출간 직후 『제국』을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글들이 쏟아졌다. 에티엔느 발리바르, 프레드릭 재므슨, 슬라보예 지젝 등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정치철학자들이 이 책의 논평자들이었다. 이후 ‘『제국』 신드롬’이라고 할 만큼 ‘제국’에 관한 다수의 저작들이 출간된다. 2004년,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의 후속작이며 오늘날 새로운 주체성을 탐구한 『다중』(Multitude)을 출간했다. 이 책은 또 한 번 두 사람을 논란의 무대 중심에 올려놓았다. 『제국』과 『다중』은 각각 한국에 2001년, 2008년에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한국에서도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다중인가 노동계급인가’ 등의 논쟁이 지속되었고, 현재도 여전히 활발히 진행 중이다.
제국론과 다중론의 사상적 기원의 시기 『네그리 사상의 진화』는 네그리의 사상적 운동적 동료인 마이클 하트가 직접 쓴 네그리 사상에 대한 알기 쉬운 입문서이다. 현재 미국 듀크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며, ‘맑스주의와 사회’라는 강의를 하고 『제국』, 『다중』 그리고 『디오니소스의 노동』을 네그리와 함께 작업한 하트는 오늘날 네그리의 사상을 가장 깊고 풍부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상가이다. 『네그리 사상의 진화』는 네그리가 가장 격동적으로 활동한 시기를 다루며, 오페라이스모, 아우또노미아 운동 등 1978년까지 진화해온 네그리 사상의 궤적을 총정리한다. 하트에 따르면 이 시기에 네그리는 <비판적 맑스주의> → <기획적 맑스주의> → <코뮤니즘의 구성>으로 사상적 진화를 거듭한다. 특히 이 시기는 제국론과 다중론의 사상적 기원의 형성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될 필요가 있다. 코뮤니즘 구성의 시기에 네그리가 이론화하는 ‘사회적 노동자’ 개념은 ‘다중’을 예비하는 개념이었다. 그간 한국 사회에서 네그리의 사상을 둘러싼 논의는 이 시기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아 적지 않은 아쉬움을 남겼다. 이 책은 이러한 아쉬움을 한 번에 날려줄 것이다.
‘아고라 촛불 시대’, ‘집단지성·다중지성 시대’의 새로운 네트워크 조직화론 하트가 이 책을 통해 탐구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 중 하나는 조직화론이다. 오늘날 포스트 구조주의 혹은 포스트 모더니즘은 ‘주체성의 조직화론’이 부재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하트는 네그리가 포스트 구조주의를 갱신하고, 오늘날의 세계에 맞는 조직화론을 정립하였음을 제시하고 있다. 네그리는 산업 전문노동자/대중노동자 시기에 출현한 레닌의 중앙집중적 당 조직화론이 비물질노동, 사회적 노동이 생산을 지배하는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또한 하트는 『네그리 사상의 진화』의 철학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는 『들뢰즈 사상의 진화』(마이클 하트 지음, 갈무리, 2004)에서 탐구한 들뢰즈의 조직화론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토대로 네그리의 조직화론을 설명한다. 레닌과 들뢰즈의 조직화론 검토를 통해 네그리가 주장하는 조직화론은 중앙집중적 당 중심의 조직화론이 아니라 네트워크 조직화론이다. 이러한 네그리의 네트워크 조직화론은 2008년 한국의 촛불집회에서 중요한 쟁점으로 제기된 ‘촛불들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에 주요한 참조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 상륙한 ‘이탈리아 효과’(Italian Effect) 2004년 9월 호주 시드니에서 개최된 대규모 포럼에서 ‘이탈리아 효과’가 진지하게 검토되었다. 이 포럼의 주요 내용은 철학의 주도권이 이전의 영미철학에서 1990년대에는 프랑스철학으로, 21세기의 벽두인 2000년대에는 이탈리아 철학으로 옮겨갔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1968혁명의 철학자들인 프랑스의 들뢰즈, 기 드보르, 푸꼬 등이 모두 사망한 후 안또니오 네그리, 빠올로 비르노(『다중』), 조르조 아감벤(『호모 사케르』), 마우리찌오 랏짜랏또(『비물질노동과 다중』), 프랑꼬 베라르디 등 이탈리아 철학의 흥기 현상을 주목하였다. 최근 한국에도 ‘이탈리아 효과’가 거세지고 있으며, 이 뿌리에는 안또니오 네그리의 사상이 깊게 자리 잡고 있음을 그간의 한국 내 논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네그리 사상의 진화』는 이러한 네그리 사상을 한눈에 밝혀주는 입체적 조감도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2. 『네그리 사상의 진화』에서 볼 수 있는 네그리 사상의 정수들 “네그리의 사상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시기 이후에 하트의 도움을 얻으면서 제국론과 다중론으로 발전해나간다. 사실 네그리가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제국』Empire, 2000이 나오고 난 다음으로 보아야 할 텐데, 네그리에게 호감을 가진 독자이든 비판적인 독자이든 많은 이들이 네그리의 초기의 사상적 진화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못한 채로 그의 성숙기의 사상을 접했던 것 같다. 이제 이 책에 제시된 하트의 논의는 이러한 독자들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옮긴이의 말: 정치적 실천의 구성적 존재론을 향하여」 중에서, 23쪽)
“안또니오 네그리의 사상을 연구하기에 앞서, 우리는 그것을 몇몇 상이한 맥락들, 즉 사회이론, 비판적 맑스주의critical Marxism 그리고 1960년대 초에 시작된 이탈리아의 이론운동인 오페라이스모Operaismo 혹은 노동자주의의 맥락 안에 놓고 볼 필요가 있다. 이 시기에 대한 우리의 주된 관심이 네그리의 이론적 기여의 독창성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분명 독창적이고 설득력있는 분석이 여기에 있기는 하다. 그러나 만약 네그리의 작업이 1968년에 종결되었다면 여기서 그것은 더 이상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다. 그 대신 우리가 이 시기에 갖는 주된 관심은 그것이 확립하는 토대와 그것이 제기하는 긴장들 때문이다. 이러한 긴장들이, 그 이후의 시기들에서 보이는 네그리의 이론적 발전의 동력이라는 점이 입증될 것이다.”(「1장 폭풍 전야: 비판적 맑스주의」 중에서, 27~28쪽)
“네그리의 새로운 이론적 접근법은 맑스주의적 틀을 다시 만들려는 시도로 읽힐 수 있다. 비판적 맑스주의로부터 “기획적 맑스주의projective Marxism”라고 내가 부르는 것으로의 이행인 것이다. (……) 네그리에게 중대한 시기는 인식론에 관련되기 보다는 주체성과 관련된다. “맑스의 사유의 진화는 ‘주체 없는 과정’에서 끝나는 게 결코 아니고, 무엇보다도 혁명주체의 조직화된 실재를 항상 밀접히 따라간다.”[103 note] 네그리 사유에서는, 레닌적 관점과 노동자 운동의 점증하는 압력이 주체론적 휴지로 특징지어진다.”(『2장 공장 안으로: 레닌과 주체론적 휴지』 중에서, 96~97쪽)
“네그리의 존재론은 힘의 발휘에 의하여 구성되는 물질적 역사적 장場에 긍정적 토대를 둔다는 점에서 푸꼬의 존재론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이다. 그러나 네그리는 사회적 주체들이 실천의 조직화를 통하여 이러한 존재론적 구성과정에 개입하는 수단을 찾고자 한다. 네그리의 틀에서 정치적 조직화는 존재의 실재적 조직화이다.”(「논평: 푸꼬를 뒤집기-네그리의 구성적 존재론」 중에서, 210쪽)
3. 지은이·옮긴이 소개 |지은이|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1960~ ) 1990년 워싱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국 듀크 대학의 문학 소설 연구학부 교수로 있다. '맑스주의와 사회'라는 강의를 개설하고 있으며, 20세기 문학의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탈리아의 아우또노미아 사상을 미국에 소개하는 데 많은 힘을 쏟고 있으며, 네그리의 『야만적 별종』을 비롯하여 아우또노미아 사상가들의 책을 여러 권 영역하기로 했다. 네그리의 지도로 들뢰즈, 오페라이스모, 아우또노미아 등의 진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받은 후 네그리와 함께 『제국』과 『다중』을 공동집필하는 등 협력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들뢰즈 사상의 진화』(갈무리, 2004), 『디오니소스의 노동 1,2권』(갈무리, 1996~7)이 있다.
|옮긴이| 정남영(Chung, Nam Young, 1958~ ) 서울대 영문과에서 찰스 디킨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경원대 영문과에서 20년 동안 영소설을 가르치고 있다. 디킨스를 통해 리얼리즘론의 재구성을 시도한 『리얼리즘과 그 너머』(갈무리, 2001)를 지었다. 안또니오 네그리의 『혁명의 시간』(갈무리, 2004)을 번역하고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다중』(세종서적, 2008)을 공역하였다. <다중지성의 정원>(http://daziwon.net)의 상임강사이다.
박서현(Park, Seo Hyun, 1981~ )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자율평론』과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활동하며 하이데거에 관한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중이다.
4. 『네그리 사상의 진화』의 차례
옮긴이의 말: 정치적 실천의 구성적 존재론을 향하여
1장 폭풍 전야: 비판적 맑스주의 1. 오페라이스모와 비판의 주체 29 2. 비판적 기획의 분열된 인격 40 3. 자유주의의 종말: 국가와 자본 47 4. 케인즈적 국가와 계획된 평형 57 5. 노동과 헌법: 법형식주의의 변형 64 6. 노동권이론과 자본의 사회주의 74 7. 자본주의적 발전의 변증법 79 8. 자본의 기획에 내재된 긴장 83
2장 공장 안으로: 레닌과 주체론적 휴지 1. 계획자국가의 위기 98 2. 자연발생성과 주체성: 레닌적 조직화1 105 3. 특정한 계급구성: 레닌적 조직화2 114 4. 레닌의 현대성: 기획적 맑스주의 117 5. 대중적 전위와 노동자 중심성의 애매성 122 6. 정치적 폭력과 테러리즘 128 논평: 레닌과 니체-주체론적 휴지와 존재론적 휴지 134 7. 국가를 파괴하는 주체: 레닌과 빠슈까니스 144
3장 코뮤니즘의 구성 1. 『자본론』에서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으로 161 2. 사회주의는 불가능하다: 가치법칙의 위기 166 3. 잉여가치와 이윤 173 4. 자기가치화와 임금론 178 논평: 자기가치화의 실천 186 5. 주체의 구성 190 6. 사회적 노동자: 주체의 새로운 문제틀 197 논평: 푸꼬를 뒤집기-네그리의 구성적 존재론 202 결론적 논평: 조직화의 예술 211
"마이클 하트는 워싱턴의 미 의회 도서관에서 소련경제 전문가로 일하는 아버지를 두었으며 대학에서 엔지니어링을 전공한 후 에너지 위기에 관심을 갖고 대체 에너지를 연구한 공학도였다. 그는 이탈리아의 한 공장에서 태양전지판을 만드는 일을 한 적도 있었다. 네그리를 만나기 전에 그는, 중남미로부터 온 이민을 보호해주고 그들의 고통을 알리는 피난처 운동에 참여한 바 있고 또 한때는 멕시코와 엘살바도르에서 전개된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한 적도 있었다. 그가 네그리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83년 이후 워싱턴 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하다가 마침내 이탈리아의 아우또노미아 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였다. 프랑스로 건너온 하트는, 파리 8대학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치던 네그리의 지도를 받으면서, 들뢰즈의 탈구조주의 철학을 자율주의적 관점에서 주의 깊게 분석한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했다."
마지막 문장에 언급된 논문이 『들뢰즈 사상의 진화』와 『네그리 사상의 진화』이죠. 좀 더 극적인(!) 둘의 만남 과정이 있을 수 있겠지만 지금은 모르겠어요^^ 더 알게 되면 올려보죠.
들뢰즈에 대한 흥미로운 책이 한 권 번역되었다. 키스 포크너(Keith Faulkner)의 <들뢰즈와 시간의 세 가지 종합>이라는 책으로, 들뢰즈의 시간론에 대한 연구서이다. 자세한 소개는 아래 가져온 알라딘에 올라온 출판사의 소개를 참조하면 좋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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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이후의 철학적 성과를 집성하고 있는 <리좀 총서>의 다섯번째 권인 이 책은 들뢰즈의 시간론을 무의식적 층위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는 연구서이다. 본체적·능동적인 주체를 주장하는 칸트의 이론을 의문에 부치며 프로이트를 통해 들뢰즈의 수동적 종합을 해설하여 들뢰즈 연구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책이다.
들뢰즈 시간론에 대한 본격적인 해설서!! 무의식의 주체 이론으로 칸트의 종합 이론을 넘어서다!
키스 포크너(Keith Faulkner)의 <들뢰즈와 시간의 세 가지 종합>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2장(반복론=시간론)에 대한 본격적인 해설서이다. <차이와 반복>을 조금이라도 읽어 본 독자라면 서구의 철학사를 가로지르며 ‘동일성, 존재, 일자(一者)’를 ‘차이, 생성, 다자(多者)’로 전복시킨 들뢰즈의 (천재적인) 사유에 공감하면서도 그리 친절하지 않은 설명 탓에 읽는 데 애를 먹었을 것이다. 더욱이 <차이와 반복>의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2장은 칸트, 후설, 흄, 베르그손, 니체, 프로이트, 프루스트 등의 논의들을 가로질러 독특한 시간론으로 발전시키고 있기 때문에 마치 비문(秘文)을 읽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그런 점에서 <차이와 반복>의 시간론에 대한 해설서가 번역되었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반갑기만 하다.
사실 <차이와 반복>의 시간론에 대한 해설서는 국내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들뢰즈의 시간론은 주로 <시네마>의 운동-이미지나 시간-이미지를 중심으로 소개되어 왔다. 반면에 <차이와 반복>의 시간론은 흔히 ‘차이의 반복’ 혹은 ‘차이를 동반한 반복’ 등의 다소 뭉뚱그려서 설명하는 방식으로 쉽게 지나쳐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들뢰즈의 사상은 정작 ‘시간 없는 시간론, 생성 없는 생성론’이라는 기묘한 형태로 국내에 유통되어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의 부재는 들뢰즈의 사상을 주로 (시간이 배제된) 공간론적 ‘차이’로 환원시켜 버리는 반(反)들뢰즈적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생성과 시간을 결여한 차이(difference)는 동일성의 반립으로 정의되거나, 기껏해야 (선험적) 항들 사이의 항차(項差)에 머물 뿐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생성(differentiation)은 반복을 관조하고 수축하는 애벌레 자아들을 통해 풍요롭게 전개된다.
들뢰즈 이후의 철학적 성과를 집성하고 있는 <리좀 총서>의 다섯번째 권인 이 책은 이와 같이 ‘차이와 반복’에 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무의식적 층위의 관점에서 주체의 시간의 종합 이론을 독창적으로 해석해 내고 있다. 프로이트는 들뢰즈에 관한 연구 중 아직까지 깊이 있게 다루어지지 못한 성역이었다. 지금껏 베르그손이나 니체, 스피노자와의 관계에만 한정되어 다루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핵심 논의 중 하나를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들뢰즈가 말하는 ‘시간적 주체론’의 핵심에 다가설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프로이트와 들뢰즈의 상관관계, 특히 프로이트의 개념과 연구성과를 활용한 들뢰즈의 독창적인 사유의 전개를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키스 안셀-피어슨이 말한 바와 같이 “들뢰즈 연구자와 학생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며, 시간의 철학에 흥미를 갖고 있는 이들에게 보답을 줄 책이다”.
이 책의 특징 : 프로이트를 등에 업은 들뢰즈 포크너는 이 책의 전체적인 논의를 수동적 종합의 정신분석학적 맥락을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전면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프로이트이다. 그동안 <안티 오이디푸스>라는 표제에서 미루어보듯 들뢰즈와 프로이트의 관계를 적대적으로 생각해 왔던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포크너는 시간의 세 가지 종합을 논하는 상당수의 주석들이 주로 흄, 베르그손, 니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으며, 프로이트와 들뢰즈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사실 프로이트 없이 들뢰즈의 사상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프로이트를 무시하고서는 들뢰즈가 말하는 ‘옷 입은 반복’이란 불가능하고, 들뢰즈를 일방적이고 단편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유기체적 층위만을 가지고 주체를 설명하려 한다면, 무의식적 층위를 중심으로 다른 층위들이 함께 엮이면서 작동하는 복잡한 주체의 형성과 그로 인한 시간의 발생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주체라는 것 자체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시간 속에서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과정을 통해 구성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프로이트의 ‘유아 성욕론’과 신경학적 맥락은 <차이와 반복>의 시간론에서 중추적인 요소를 이루고 있다(2장 참조).
포크너는 들뢰즈의 저작들과 프로이트의 저작들을 꼼꼼하게 독해하면서 어떤 면에서 프로이트와 들뢰즈 간에 영향관계가 있는지 확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신분석학의 층위에서 펼쳐지는 들뢰즈의 시간론을 독창적으로 연구해 낼 수 있었다. 그 중 프로이트의 초기작인 <과학적 심리학 초고>에서 사용되었던 용어와 들뢰즈가 펼치고 있는 개념들의 상관관계를 읽어 내고,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토템과 터부> 등에서 들뢰즈가 시간과 관련하여 사용하는 ‘강요된 운동’, ‘공명’과 같은 용어와 ‘순수사건’ 이론 등을 설명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것이 본체적·능동적인 주체를 주장하는 칸트의 이론을 의문에 부치는 들뢰즈의 수동적 종합의 한 축을 이루고 있음을 증명해 낸다.
이 책의 구성 : 들뢰즈의 수동적 종합을 밝히다 포크너의 책 <들뢰즈와 시간의 세 가지 종합>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1장에서는 칸트의 시간의 세 가지 종합을 들뢰즈가 어떻게 비판하고 (수동적 종합으로) 재구성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칸트의 능동적 종합 아래에서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수동적 종합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2장에서는 성욕과 관련된 시간의 수동적 종합, 즉 수동적 종합의 정신분석학적 층위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는 시간의 발생에 있어 빠질 수 없는 성욕(sexuality)과 자아 형성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3장에서는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생물심리학적 삶’이라고 부르는, 수동적 종합의 신경학적 층위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는 들뢰즈가 수동적 종합을 생물심리학적 맥락으로 탈바꿈시킨 대목들을 (프로이트를 동원해)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4장에서는 시간의 텅 빈 형식과 관련된 시간의 정적 발생과 니체의 영원회귀론을 다루고 있다. 특별히 해럴드 로젠버그(Harold Rosenberg)의 등장인물 변화와 드라마 이론들을 사용해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한 해석을 이끌어 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결론에서는 들뢰즈에게 미친 동시대의 세 가지 영향들, 즉 구조주의, 하이데거, 현대소설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
이 책의 지은이 : 들뢰즈 시간론에 대한 치밀한 분석가 키스 포크너는 국내에 <싹트는 생명>의 저자로 잘 알려진 키스 안셀-피어슨의 제자이기도 하다. 그는 영국 워릭대학교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을 토대로 2006년에 이 책을 출간하였는데, 그때까지 이렇게 상세하고 치밀하게 <차이와 반복>의 시간론을 설명한 해설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 책은 출간과 동시에 국내 외의 많은 들뢰즈 연구자들의 찬사와 함께 그들의 필독서로 자리매김하였다. 아직까지도 이 책에 버금가는 <차이와 반복>의 시간론에 대한 해설서는 눈에 띄지 않고 있다. 그는 또한 2007년 말에도 <시간의 힘>(The Force of Time : An Introduction to Deleuze through Proust)이라는 무게감 있는 저작을 발표해 들뢰즈 시간론에 대한 연구를 계속 이어가면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젊은 철학자가 되었다.
개인들의 자기계발/자기경영 담론은 오늘 자본주의 초국적 기업의 강력한 명령이다. 이 자본주의적 정치를 전복하는 것이 오늘날 중요한 과제이다.
"기업에 의해 행사되고 기업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사회적 노동에 대한 명령의 자본주의적 조직화를 전복하는 것이 오늘날 혁명적 조직화의 가장 중요한 전술적 과제이다. 이 분명한 전복적 강령을 채택하지 않는 것은 대중들의 코뮤니즘적 운동이 억압에 의해--법에 의해서라 아니라, 체제의 손에 있는 물질적 수단에 의해서--무력화될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며, 결국 그것은 운동 전반을 위한 어떠한 직접적인 조직절 결과로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 네그리, 『혁명의 만회』, 218쪽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사랑의 변주곡’)고 시인 김수영은 적었다. 어디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사랑뿐이겠는가. 사랑을 발견하기 위해 욕망의 입을 뒤지는 행위가 필수적으로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 폭력이라면, 사랑의 밑자리에는 언제나 폭력이 가로놓여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이건 보편적 폭력이다.
러시아 시인 푸슈킨은 시 ‘예언자’에서 예언자로 재탄생하는 장면을 마치 세라핌(천사)이 ‘외과적 수술’을 시행하는 것처럼 묘사한 바 있다(실상 ‘세라핌’이라는 이름 자체가 히브리어로 ‘높은 존재’ 혹은 ‘수호천사’를 의미하는 ‘셀’과 ‘치유하는 자’, 혹은 ‘외과의’를 의미하는 ‘라파’의 합성어이다).
시에서 세라핌은 ‘나’의 죄 많은 혀를 뽑아내고 그 자리에 지혜로운 뱀의 혀를 다시 심는다. 그리고 또 가슴을 칼로 가르고 심장을 뽑아낸 다음에 불타오르는 숯 덩어리를 집어넣는다. 그리하여 ‘내’가 황야에서 시체처럼 누워있을 때 신의 음성을 듣는다. “일어나라, 예언자여, 보라, 들으라,/ 나의 의지로 가득 차서,/ 바다와 육지를 돌아다니며/ 말로써 사람들의 가슴을 불태우라.”
세라핌에 의해 ‘나’는 강제적으로 시체가 되고 그런 이후에야 ‘예언자’로서 부름을 받으며 다시 태어난다. 여기서의 ‘성스러운’ 폭력은 모든 (재)탄생이 수반하거나 요구하는 폭력이기에 보편적이다. 자살폭탄 ‘테러리스트’의 탄생 또한 동일한 과정을 거치는 것 아닌가. 다만 그는 ‘말’이 아닌 ‘폭탄’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불태울 것이다.
기원으로서의 폭력
태초에 폭력이 있었다. 오직 폭력을 통해서만 새로운 세상은 창조되기 때문이다. 로제 다둔이 <폭력>(동문선)에서 지적한 대로 ‘창세기’에서 “신은 명령하고 명명하고 구분하고 분리하고 분류하는데, 이 모든 행위가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폭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폭력이 사라지는 유일한 순간은 다만 일곱째 날인 ‘안식일’뿐이다(비폭력의 윤리는 이러한 신의 모습을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낙원에서 추방된 아담과 이브가 낳은 형제 중에 인류의 조상이 된 자는 동생 아벨을 죽인 살인자 카인이다(인류는 모두 ‘카인의 후예’이다!). 카인은 자신의 행위로 인해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까봐 두려워하지만 신(여호와)은 그를 보호한다. 카인에게 표를 주며 그를 죽이는 자는 일곱 배의 복수를 당하리라고 말했던 것이다. 성서에 따를 때, 인류의 역사는 살인자(카인)와 보호자(신)가 공모한 역사, 곧 ‘폭력의 역사’이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화 <폭력의 역사>(2005)는 이러한 인류사에 대한 알레고리로도 읽힌다. 미국의 한 작은 마을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톰 스톨은 평범한 중년 가장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식당에 이유 없이 살인을 일삼고 다니는 두 남자가 침입하여 소동을 일으키고 그는 여종업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두 악당을 순식간에 해치운다.
이 사건으로 매스컴의 ‘영웅’이 된 톰에게 마피아 일당이 찾아와 그가 20년 전 조직의 일원이자 유명한 킬러 ‘조이’였음을 상기시키며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을 강요한다. 톰은 자신이 조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만 결국 가정을 지키기 위해 일당과 맞선다. 그리고 필라델피아로 가서 그를 제거하려는 형 리치 일당 또한 모두 해치우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폭력은 두 가지다. 먼저 톰이 자신의 새로운 삶을 위해서 철저하게 숨겨야만 했던 조이의 폭력,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가정과 아버지의 자리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저지르게 되는 폭력. 그 폭력은 톰의 것인가 조이의 것인가. 과거의 조이는 현재의 톰이 부인하지만 제거할 수 없는 그의 또 다른 자아이자 그림자이다. 역설적인 것은 조이의 킬러 본능이 위험의 순간에는 자신과 가족을 구하는 영웅적인 능력이 된다는 점. 때문에 이 가장의 폭력은 가정을 위협하면서도 동시에 보호하는 양면적인 것이다.
문학비평가이자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가 ‘세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숨겨져 온 것’이라고 이름붙인 것이 말하자면 이러한 초석적 폭력, 정초적 폭력이다(톰/조이의 경우에는 ‘가정이 만들어질 때부터 숨겨져 온 것’이라고 말해야겠다). 한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폭력이 제어·제한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폭력을 속이는 수밖에 없다(톰은 학교에서 괴롭히는 친구들에게 폭력을 휘두른 아들을 크게 야단치고 훈계한다).
그렇게 ‘폭력을 속이는 폭력’이 제의적 희생에서의 폭력이며, 이때 요구되는 믿음이 ‘좋은 폭력’(정당한 폭력)과 ‘나쁜 폭력’(부당한 폭력), ‘순수한 폭력’과 ‘불순한 폭력’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믿음이다.
가령, 한나 아렌트는 <폭력의 세기>(이후)에서 폭력(violence)과 권력(power)을 엄격하게 구별한다. 아렌트에게 권력이란 사람들이 함께 모여 행동할 때, 곧 정치적 행위에 참여할 때 생겨나는 것으로 이미 그 자체가 정당성을 갖는다. 때문에 ‘정당화’가 따로 필요한 폭력과는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이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1921)에서 제시하고 있는 정초적 폭력과 보존적 폭력의 구분도 마찬가지다. 그가 ‘정초적 폭력’이라고 부른 것은 자기 이전에 어떠한 토대도 갖지 않으며 오직 자신에게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폭력이었다.
물론 벤야민의 ‘폭력비판’에서 ‘폭력’이란 말의 원어는 ‘게발트(Gewalt)’이고 이것은 ‘지배/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정당한 가제’란 뜻을 갖기 때문에 권력과 모순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의회/대의 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 폭력의 두 계기를 분리하고 신적 폭력으로서의 정초적 폭력을 옹호한다.
데리다가 <법의 힘>(문학과지성사)에서 벤야민의 폭력비판론을 검토하며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권위의 신비한 토대’이면서 ‘법의 구조’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법의 정초 혹은 정립은 정초적 폭력에 근거한다. 요컨대, 법의 힘은 폭력에 대립적이지만, 법의 기원에 놓여 있는 것은 폭력이다. 기원적 폭력, 즉 “권위의 기원이나 법의 기초, 토대 또는 정립은 정의상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들에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토대를 지니고 있지 않은 폭력들이다.” 때문에 법은 그 정초의 순간에 불법적이지도 비합법적이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표상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이러한 정초적 폭력이 보존적 폭력에 의해 언제나 표상/대리되고 필연적으로 반복되어야 하다는 사실에 있다. 때문에 데리다가 보기에 법의 구조는 언제나 해체가능하며 정초적 폭력과 보존적 폭력은 서로 의존적이다.
폭력에 대한 사유 - 이분법을 넘어서
아렌트나 벤야민의 경우에서 알 수 있지만 폭력에 대한 사유나 성찰은 폭력을 무엇과 대비시키느냐, 혹은 그것을 어떻게 구분하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규정된다. 아렌트에 의해 폭력을 정당화하는 좌파 사회주의자로 비판을 받기도 했던 조르주 소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단, 아렌트와 달리 그가 <폭력에 대한 성찰>(나남)에서 제시하고 있는 이분법은 무력(force)과 폭력(violence)이다.
전자가 지배체제가 동원하는 제도적 강압이나 물리적 강제 등의 억압적 폭력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그에 대한 탈법적 항거나 저항 같은 해방적 폭력을 뜻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무력이 소수 지배자의 통치 질서를 강제하는 힘이라면, 폭력은 기존 질서의 파괴를 지향하는 힘이다.” 소렐은 그런 의미에서의 폭력, 보다 구체적으론 프롤레타리아의 혁명무기로서의 총파업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그리고 이때의 폭력은 그 라틴어 어원인 ‘비스(vis)’에 충실한 것이기도 하다.
로제 다둔에 따르면, ‘비스’는 ‘힘의 발휘’ ‘폭력행위’ 그리고 ‘군대의 힘’을 가리키며 ‘존재의 본질’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즉 폭력은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규정이기도 한 것이다. 호모 비오랑스, 곧 ‘폭력적 인간’이란 규정이 이로부터 생성된다. 그리고 이 ‘폭력적 인간’은 니체적인 명명에 따르자면 ‘디오니소스적 인간’이 될 것이다.
이때의 디오니소스는 테리 이글턴이 <성스러운 테러>(생각의나무)에서 다시 읽고 있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바쿠스>에서 등장하는 디오니소스이다. 즉 “포도주와 가무, 환희와 연극, 풍요와 과잉, 영감의 신”이면서 동시에 “탐욕적이고 폭력적이며 차이를 적대하는 획일성의 지지자”로서의 디오니소스. 디오니스소의 이러한 양면성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면, 폭력성은 인간의 부정적이거나 부수적인 자질이 아니라 그 본성이다.
<바쿠스>에 등장하는 테바이의 지도자 펜테우스는 디오니소스 숭배에 적개심을 품고서 그의 성소를 부숴버리고 아예 신을 감옥에 가두어버린다. 물론 화가 난 디오니소스는 지진을 일으켜 감옥을 나온 뒤에 무자비한 복수를 감행한다. 디오니소스성이 우리가 제거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그에 대한 억압이 아니라 존중이다. 그것은 디오니소스가 펜테우스의 타자가 아니라 펜테우스 안에 잠복한, 또 다른 자아이기도 하다는 걸 인정하는 태도이다. <폭력의 역사>에서 비록 타의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마치 톰이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조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폭력’과 ‘비폭력’이란 개념쌍의 상투적인 이해도 이러한 맥락에서 교정될 필요가 있다. 사카이 다카시가 <폭력의 철학>(산눈)에서 정리하는 바에 따르면, ‘비폭력’은 단지 ‘평화’를 희원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에 힘을!’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마틴 루터 킹은 이렇게 말했다: “비폭력 직접 행동의 목적은 대화를 끊임없이 거부해온 사회에 어떻게든 우리가 제시한 쟁점과 대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위기감과 긴장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중략) 저는 지금까지 폭력적 긴장에는 진실로 반대해왔습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건설적인 비폭력적 긴장은 사태의 진전에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1960년 정치운동으로서의 비폭력 직접행동은 잠재적으로 숨어 있는 사회의 적대성을 폭로하거나 구축하는 수단이었다. 때문에 비폭력은 폭력에 대한 무저항과는 거리가 멀다. 이 점에 있어서는 킹과 다른 노선을 걸었던 맬컴 엑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은폐되고 억압된 적대성을 드러내는 것이 그에게서도 일차적인 목표였기 때문이다. 맬컴이 주장한 것은 흑인들이 자기 혹은 타자에게 갖고 있는 증오를 분노로 전화시키는 것이었다. 증오는 증오를 낳는 근본 원인 대신 결과를 특정한 인간이나 집단에 투사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얻고자 하는 데 반해, 분노는 보다 광범위한 사회적 조건을 변화시키려는 태도를 함축한다.
맬컴 엑스의 동시대인이었던 알제리의 정신과의사 프란츠 파농 역시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그린비)을 통해서 식민주의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대항적 폭력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에 따르면 식민주의는 그 자체 속에 이미 폭력이 편재해 있으며, 이러한 폭력은 굴절적인 형태(정신병)로 피식민 주체들에게 들러붙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폭력은 이러한 내향성을 중단시키고 식민주의 자체로 방향을 돌리게끔 하는 긍정적인 계기가 된다. “폭력은 취기를 깨우는 해독작용이다. 원주민의 열등 콤플렉스나 방관 내지 절망적인 태도를 없애준다. 폭력은 그들을 대담하게 만들며 자기 자신에 대한 존엄성을 회복시킨다.”
폭력을 넘어서기 - ‘정치적인 것’의 도입
사카이 다카시는 이렇듯 폭력의 다양한 양상과 양태, 그리고 의의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폭력/비폭력이란 이분법은 부적절하다고 판단하며 거기에 ‘반폭력(anti-violence)’이란 범주를 추가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반폭력은 테러에도 반대하고 전쟁에도 반대한다는 ‘막연히 올바른 도덕’에 대한 반대를 뜻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도덕이 아니라 정치이고, ‘정치적인 것’의 복원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자크 랑시에르는 광의의 행정을 포함시킨 폴리스(police)의 논리와 정치를 일컫는 폴리틱스(politics)의 논리를 구분한다. 폴리스란 이미 존재하는 지위나 역할에 사람들을 배분하고 고정시키는 것이고, 폴리틱스란 배제된 사람들(이민자, 비국민, 이등시민, 정신이상자 등)을 보편적인 이해를 공유하고 있는 자들로 간주하는 것이다.
폴리스의 논리가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위계질서를 세우고자 한다면 폴리틱스의 논리는 평등을 도입함으로써 이러한 질서를 뒤흔든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정치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폴리스의 논리와 평등주의의 논리가 만나는 지점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랑시에르가 들고 있는 사례로는 “너의 직업은?”이라는 폴리스적 논리의 질문에 “프롤레타리아”라고 폴리틱스적 논리로 대답하는 대목이 정치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정치적 주체로서의 해방적 주체, 혁명적 주체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슬라보예 지젝이 <혁명이 다가온다>(길)에서 데이비드 핀처의 <파이트클럽>(1999)을 예로 들면서 말해주는바, 자기 구타(폭력)를 통해서이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일을 하지 않아도 월급은 내놓아야 한다고 상사를 협박하면서 스스로를 피가 나도록 때린다.
지젝의 해석에 따르면, 이러한 급진적인 자기 비하를 통해서만 ‘순수한 주체’는 나타나게 된다. 자신을 직접 구타한다는 사실은 스스로에게 주인이 더 이상 불필요하다는 자기주장이며 “이러한 구타의 진정한 목표는 주인에게 집착하는 내 안의 어떤 것을 이겨내는 일이다.” 들뢰즈는 <매저키즘>(인간사랑)에서 가학주의가 지배의 관계를 포괄하는 반면, 피학주의는 해방을 위해 필요한 첫 과정이라고 적었다.
요컨대 “폭력은 일차적으로 자기 폭력으로 또 주체적인 존재의 본질에 대한 폭력적인 재형성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파이트클럽>의 교훈이다.” 여기서 ‘순수한 폭력’은 곧 ‘순수한 사랑’과도 만난다. 사랑은 모든 맥락에서 사랑의 대상을 떼어내어 대문자 사물(Thing), 곧 ‘숭고한 대상’(이건 '괴물'이기도 하다)으로 고양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김수영의 시구를 빌자면,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이렇듯 미쳐 날뛰는 것이 사랑의 광기이고 폭력의 광기일 테다. 모든 현상을 ‘좋은’ 면과 ‘나쁜’ 면으로 구별하고 좋은 것만 취하고 나쁜 것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태도(웰빙적 태도!)는 맑스가 지적한바 전형적인 쁘띠부르주아적 태도이다. 이것은 사랑과 폭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지난 5월 2일 이후 근 3개월 동안 연일 촛불문화제, 집회, 가두투쟁 등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 시간 동안 촛불다중들이 창안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행정-사법-입법 기관을 장악하고 언론권력인 조중동문을 손에 쥐고 YTN, KBS, MBC를 장악하여 촛불들을 공격하려는 이때, 우리가 지금까지 새롭게 열어온 것들에 대한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토론의 성지'라고 스스로 지칭하며, 이제 '투쟁의 성지', '민주주의의 성지'라고 불릴 수 있는 다음 아고라의 기록들입니다.
저는 이 책이 '투쟁 지침서'이며 '촛불봉기 지침서'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한국 현대사, 촛불봉기에 참고할 수 있는 정치 사회 철학적 설명 등이 삽입되어 있어, 새로운 인문교양서로 봐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리고 대학에서 새내기들과 함께 읽을 수 있는 세미나 교재로는 정말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명박OUT'를 바라는 모든 분들께 일독을 권합니다. 그리고 구입하신 분들은 꼭 인터넷서점에 추천 댓글을 달아주시고, 되도록이면 지하철에서 사람들 눈에 보이는 곳에서 읽어주세요. 입소문 추천은 필수옵션입니다.
아고라 폐인들 - 하루라도 아고라 토론방에 들어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을 '아고라 폐인'이라고 한다. ‘아고라폐인들’은, 처음에 눈팅을 주로 하던 네티즌들이 아고라 공동체에 기여하기 위하여 자료 수집을 해오다가 자유토론방에서 공식적으로 책을 출간하자는 의견이 떠오르자 이에 합세하여 출현하게 된 임시조직이다. 그 중심에 책임간사 한 명이 위촉되어 있을 뿐 아직 완성된 꼴을 갖추고 있지 않다. 책을 만들기 위한 자료 수집 등에 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 점점 조직화되는 추세에 있으나 도서 출간 이외의 활동 목표를 상정한 적은 없다. 현재 이 책에 이은 후속 작업으로 아고라 선집을 준비하는 중이다.
‘개체’ 모여 고도의 ‘무리 지능’ 체계 형성 이성적 다중이 지식인 빠진 ‘저항운동’ 주도 정보·전략 부재땐 파시즘·시장주의 포섭 우려
촛불집회를 통해 등장한 ‘집단 지성’의 위력과 가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최근 촛불집회 참여자들이 보여준 정보 분석, 상황 판단, 행동 결정 등의 과정에서 사회과학적 개념인 ‘집단 지성’의 실체를 발견하고 있다. 근대 이후 한국의 주요 사회변동을 이끄는 자리에 지식인들이 빠진 경우가 없었는데, 이번만큼은 지식인이 아닌 대중이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집단 지성이 촛불집회를 낳았고, 그 촛불집회를 통해 더 강력한 집단 지성이 탄생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를 설명하려는 국내 학계의 논의는 이제 막 시작됐다. 조대엽 고려대 교수(사회학)는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이를 적극 평가한다. 그는 ‘이성적 군중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본다. 조 교수는 “시민단체가 주도하는 90년대식 사회운동의 시대가 끝나고, 온라인 토론을 벌이다 이슈가 형성되면 언제든지 오프라인 직접 행동에 임하고, 그 결과를 성찰해 새로운 방향을 찾는 ‘이성적 군중’의 사회운동 시대가 왔다”고 말했다. 특히 이들 ‘이성적 군중’이 “시민단체는 물론 정당보다 훨씬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의 원천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사회학)는 그 세계사적 의미를 평가했다. 그는 “인터넷이라는 신경망을 통해 개인의 창조적 발상이 또다른 개인의 창의성을 자극·촉발하고 있다”며 “서구 학자인 네그리와 하트가 21세기 새로운 저항의 주체로 ‘집단 지성’을 거론했는데, 이를 세계에서 가장 먼저 성공적으로 실행한 것이 한국의 촛불집회”라고 말했다.
조정환 다중정원 상임강사는 근대 이후 지식·정보의 최고 권위를 상징했던 국가기구조차 넘어서는 힘이 ‘다중 지성’에게 있다고 본다. 그는 ”한국의 다중 지성이 갖추고 있는 정보 수집·분석 능력은 과거 공안기관의 수준을 넘어섰다”며 “과거에는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 쳐다보는 ‘대중’만 있었지만, 이제 세계 첨단을 달리는 인터넷에 기초해 각 개인이 분석가·정치가·활동가가 됐다”고 말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는 촛불집회 참여자들을 “지식을 생산하는 동시에 향유하는 ‘지식의 프로슈머(pro-sumer)’”라고 평가한다. 이와 관련해 그는 지식인의 자기성찰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 지성계에는 순수 이론만 추구하거나 상업주의에 영합하는 극단만 있는데, 시민들은 정보를 창출해 온라인 네트워크에 올리고 다시 시위자로 참여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사회지성의 구실을 하고 있다.”
집단 지성의 미래엔 걸림돌도 있다. 조정환 상임강사는 “어디로 흐를지 모르는 소용돌이 속에서 계속 새로운 것을 결정하기 때문에 시행착오와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항상 잠복해 있다”고 말했다. 특히 “정보가 제한된 상태에서 소수가 선동하여 특정한 방향으로 대중을 끌고가면 파시즘 등으로 치우칠 수도 있다”며 “피동적 ‘대중’과 능동적 ‘다중’을 구분하는 것은 개인이 갖고 있는 정보력”이라고 말했다.
여건종 숙명여대 교수(영문학)는 최근 상황에서 ‘대중 지성’의 가능성과 함께 ‘대중 독재’의 위험성을 발견한다. 그는 “대중이 지식인이 되고 지식인이 대중이 되는 ‘대중 지성’의 가능성을 어떻게 더 생산적으로 분출시킬 것인지에 대한 구체 전략이 없다면 오히려 시장주의 동원체제에 포섭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여 교수는 언론 지형의 변화가 이를 판가름지을 것으로 봤다. “대중은 정보를 비교·분석할 수는 있지만 정보 자체를 선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공중파 방송 등을 권력의 하수인으로 두면서 대중 지성의 토대를 대중 독재의 토양으로 전환시키려는 정치권력의 기획이 진행 중이라고 우려했다.
여러 우려에도 불구하고 큰 맥락에서 볼 때, 집단 지성이 결국 한국 사회의 또다른 출구를 찾아낼 것이라고 전망하는 학자들이 많다. 이진경 교수는 “이명박 정부가 적절한 조치 없이 집단 지성이 지치기만 기다리는 가운데 아무런 제도적 해결 없이 이번 일이 끝날 수도 있다”면서도 “그런 상황이 와도 진짜 위기에 처하는 것은 대중이 아니라 대중의 뜻을 수용하지 않는 정치체제이며, 대중은 촛불집회를 통해 느낀 즐거움과 기쁨을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앞으로도 계속 반복하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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