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사망한 팔레스타인 어린이 희생자들이 29일(현지시간) 가자지구 북쪽 지역인 베이트라히야에 있는 카말 에드완병원에서 장례식이 치러지는 동안 눕혀져 있다. 가자시티/AP 연합뉴스 |
그림 및 기사 링크: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 ··· 41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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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트리 스피박을 통해서 주로 접했던 서발턴 연구의 대표적인 학자 라하지트 구하(Ranajit Guha)의 책이 김택현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되어, 출판사의 서평을 옮겨온다. 서평을 읽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된다.
서발턴과 봉기
라나지트 구하 (지은이), 김택현 (옮긴이) | 박종철출판사
‘서발턴 연구’의 대표작 번역되다!
서발턴(subaltern). 하층민이나 군대 내에서 서열이 낮은 자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이다. 그런데 영국의 지배를 받는 식민 인도에서의 민중들의 저항운동을 ‘서발턴 연구’라는 이름으로 수행해 온 집단이 있었다. 그 대표자는 라나지트 구하(Ranajit Guha)이다. 그 구하의 ‘서발턴 연구’의 대표작인 Elementary Aspects of Peasant Insurgency in Colonial India가 『서발턴과 봉기』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옮긴이는 한국에서 서발턴 연구를 대표하는 김택현 교수이다.
저자의 이력에서 알 수 있듯이, “서발턴 연구” 집단은 기본적으로 맑스주의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정통’을 자처하는 맑스주의자들이 봉기를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치, 조직, 의식 등의 기준에 견주는 것에 서발턴 연구 집단은 반대한다. 예를 들면, 대표적인 맑스주의 역사가인 홉스봄 역시 구하에게는 비판의 대상이다.
저자 구하는 식민 시대 인도 농민들의 봉기를 묘사함에 있어서, ‘봉기’라는 말 대신에 ‘딩’, ‘비드로하’, ‘울굴란’, ‘훌’, ‘휘뚜리’ 등을 사용한다. 모두 인도 여러 부족에서 ‘봉기’를 가리키는 말들이다. 이 뿐만이 아니라 지주, 고리대금업자, 경찰서장 등을 가리키는 말들도 당시 인도 여러 부족의 언어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그것이 “농촌 대중의 그 행위를 특징짓는 의식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구하가 보기에, 영국의 지배를 받던 인도에서 벌어진 농민 봉기는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그리고 이 책의 원제 “식민 인도에서의 농민 봉기의 기초적 측면들”이 말하듯, 구하는 그 여러 봉기들의 기초적 측면들을 고찰한다. 그리고 각 장의 제목에 나타나 있듯, 부정, 모호성, 양상, 연대, 전파, 영토성 등에서 그 기초적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
농민들의 저항은 기존의 것에 대한 ‘부정’에서 시작된다. 명확한 방향을 지니지 않고 시작되는 ‘부정’은 그저 전복일 수도 있고, 뒤죽박죽으로 만들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서발턴에게는 ‘부정’ 자체가 중요하다. 그 부정은 지배층과 자신들 사이의 차이 또는 거리의 부정이다.
‘모호성’ 역시 기초적 측면의 하나이다. 도대체 산적질과 봉기 사이의 구분이 모호하다. 어디까지가 개인의 범죄인지 어디부터 사회적 의미를 갖는 봉기인지 경계가 애매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인도 농민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식민 인도에서 농민 봉기의 ‘양상’은 어떠했을까? 때려 부수기, 불 지르기, 먹기, 빼앗기! 적의 권위의 상징을 부수고, 적의 화려한 주택과 관공서에 불을 지르고, 지주와 대금업자의 가축을 먹어 치우고, 금품을 빼앗는다. 각각으로 보면 그저 파괴와 약탈처럼 보이는 이 행위들은 적절한 형식으로 결합함으로써 식민 인도에서 봉기의 요소가 될 수 있었다.
당연히 봉기에는, 곧 딩, 비드로하, 울굴란, 훌, 휘뚜리에는 ‘연대’가 필요하다. 인도에서 그 연대는 기본적으로 “5개의 번외 카스트”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전통적인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계급의식으로 무장되지는 않았으나, 배신자들에 대한 배제와 처벌은 무시무시했다.
한 곳에서 시작된 봉기는 ‘전파’된다. 영국과 인도의 관리들은 이를 ‘전염’ 또는 ‘감염’이라 부르지만, 농민은 봉기를 ‘집단 사업’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들은 농촌에서 협동하며 농사를 짓듯이, 집단 사냥을 나가고 집단 어로 활동를 하듯이, 봉기에서 함께했다. 그리고 이 전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루머’였다. 과학적 인식과 정확한 지휘가 아닌 루머!
끝으로 ‘영토성’이 기초적 측면의 하나였다. ‘쑤드’ 또는 ‘디쿠’라 불린 외지인이 자신의 영토에서 벌이는 행위에 대한 반감과 배타가 식민지 인도의 농민 봉기에서 분명 중요한 작용을 한 것이다. 이방인이 출현하기 이전인 ‘그때’와 이방인이 출현한 ‘지금’을 비교하면서, 인도의 농민들은 새로운 천년왕국을 준비한 것이다.
저자는 독일 농민전쟁을 연구한 치머만과 엥겔스, 프랑스혁명기 농민의 운동을 다룬 르페브르, 중국혁명을 이끈 마오쩌둥, ‘서발턴’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그람시 등의 논지를 자신의 소결과 연결시킨다. 비록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지역에서 벌어진 운동들이지만 그것들 모두에 공통된 어떤 것이 있는 것이다.
오랜 전통의 힌두 경전, 매우 낯선 인도 방언들은 독서를 방해하기보다는 식민 인도 서발턴인 농민들의 모습을 생생하기 전달하기 위한 도구처럼 느껴진다. “식민 인도에서의 농민 봉기의 기초적 측면들”이라는 원제가 매우 딱딱하게 느껴질지 모르나, 『서발턴과 봉기』는 마치 『수호전』과 같은 매우 재미있는 역사서이다.
원문 링크 ;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 ··· 85022512

너무 늦게 나왔다. {젠더 트러블}의 판권이 팔렸다는 소식은 진즉에 들었는데, 이제서야 출간되었다. 이 책을 어떻게든 읽어보겠다고 못하는 영어 원서를 들고 씨름하기도 했다. 가장 빠른 시일 내로 구입해서 열독할 책 1호다. 최근 또 한 권의 버틀러 책 {불확실한 삶}(클릭)이 출간되었다. 2001년 9.11 사건 이후 버틀러의 논문들이 실린 책으로, 버틀러의 폭력론과 애도론을 확인할 수 있는 저작이다. 연말 '버틀러 선물'이다. 아래 {젠더 트러블}의 출판사 서평을 옮겨온다.
젠더 트러블 -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주디스 버틀러 (지은이), 조현준 (옮긴이) | 문학동네 
페미니즘 이론의 고전, 『젠더 트러블』 드디어 국내 출간!
현존하는 최고의 페미니즘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의 주저 『젠더 트러블』이 드디어 국내에 출간되었다. 섹스(sex)와 젠더(gender)의 구분을 허물고, 지배 권력의 토대인 가부장적 이성애주의의 본질을 폭로함으로써 기존 페미니즘의 패러다임을 단숨에 전복시킨 이 책은, 역대 최고의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주디스 버틀러를 학계의 슈퍼스타로 등극시켰다. 또한 버틀러는 이 책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 지그문트 프로이트, 자크 라캉, 자크 데리다, 그리고 미셸 푸코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현대 철학자들을 ‘퀴어 이론’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조망했다. 그녀는 기존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성/문화적으로 구성된 성/본능적인 욕망이라는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구분이 지배 이데올로기의 반복된 각인 행위를 통해 자연스러운 것으로 조작된 것이며, 그 기저에는 이성애자만이 주체이고 동성애자는 비체(abject)라고 선언하는 가부장적 이성애 중심주의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규범이 만든 허구이자 규제가 만든 이상이라는 의미에서 제도, 실천, 담론의 효과이고, 결국 그 셋 모두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의미에서 광의의 젠더로 수렴되는 것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이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포괄하는 급진적 정치학이 되기 위해서는, 섹스 안에 전제된 문화적, 제도적 규제를 꿰뚫어보아야 하며, 어떤 특정한 섹슈얼리티를 비체의 기준으로 삼는 규율 권력의 지식 생산체계에도 비판적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버틀러는 주장한다.
또한 그 자신 레즈비언이기도 한 버틀러는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젠더 자체의 불확실성과 불확정성을 토대로, 동성애와 이성애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제도 담론의 권력 효과임을 폭로하고자 한다. 이는 페미니즘 이론이 여성의 권리 향상 차원을 넘어 남성까지 포함한 소수자의 섹슈얼리티 문제로 관심이 확대되는 지점이다. 동성애에 대한 버틀러의 새로운 인식론을 ‘퀴어(Qeer) 이론’이라고 부르는데, ‘퀴어’는 원래 동성애자들을 경멸적으로 부르던 호칭이었으나, 버틀러에 이르러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의미를 고정하는 모든 담론적 권력에 저항하는 전복의 표어가 된다.
결국 버틀러는 모든 정체성은 문화와 사회가 반복적으로 주입한 허구적 구성물이라고 주장하며 그런 의미에서 섹스나 섹슈얼리티도 ‘젠더’라고 말한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젠더는 없다”. 모든 것은 법과 권력과 담론의 이차적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의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구분되지 않을뿐더러, 젠더마저도 명사로 고정하거나 규정할 수 없다. 몸도, 정체성도, 욕망마저도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의미에서 모두 젠더이고, 그런 젠더는 안정될 수 없어 부표하는 인공물이자 동사이다.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에 강제된 질서를 뒤집는 전복적 상상력!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1부는 주로 ‘여성 없는 페미니즘’, 정확히 말하면 여성이라는 범주가 없는 페미니즘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도발적 문제 제기의 장이다. 2부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비판하면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 3부에서는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모성적 몸과 기호계 논의를 비판하고, 위티그나 푸코 논의의 장점과 한계를 지적하면서 버틀러 자신의 독특한 젠더 논의를 정리해나간다.
1부 「섹스/젠더/욕망의 주체들」은 페미니즘의 주체에 대한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을 모색하며 뤼스 이리가레나 모니크 위티그의 문제의식을 끌어와서 이들의 기여와 한계점을 밝히고자 한다. 이리가레는 프로이트 식의 결핍이나 결여로서의 여성성을 극복하려 했지만, 여성을 다시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적 언어 안의 재현 불가능성으로 고정한다는 혐의로 비판받는다.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모니크 위티그는 강제적 이성애와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에서 여성도 남성도 아닌 레즈비언을 대안적인 성으로 고정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 장에서 핵심적인 사상은 페미니즘의 주체로서의 ‘여성들’은 아무리 복수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해도 범주화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미 섹스/젠더/섹슈얼리티를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성/문화적으로 구성된 성/근본적이고 기원적인 욕망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강제적 질서에 따르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섹스/젠더/섹슈얼리티는 몸/정체성/욕망으로 분명하게 구획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제도문화의 이차적 구성물이자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광의의 젠더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2부 「금지, 정신분석학, 그리고 이성애적 모태의 생산」은 구조주의, 정신분석학, 페미니즘의 틀 안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들을 비판하려는 것이다. 여성을 교환 대상으로 바라보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뿐 아니라 조앤 리비에르 이래로 여성을 가면으로 의미화하려는 정신분석학적인 논의들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특히 결여를 가리기 위한 가면으로서의 여성의 상징적 위치를 ‘팔루스 되기/가지기’라고 본 자크 라캉의 논의는 비판의 핵심에 있다. 게일 루빈이나 뤼스 이리가레도 또다른 방식으로 여성성을 물화한다는 혐의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버틀러는 여성 젠더의 일의성을 주장하며 젠더 정체성의 이분법에 의지하는 모든 논의들을 비판하면서 프로이트가 말하는 우울증의 방식으로, 즉 사랑했던 대상이 주체의 에고로 ‘불완전하게 합체’되는 방식으로 젠더가 형성되는 과정을 논의한다. 정신분석학은 욕망을 전제한 뒤 그 욕망을 금지하는 법을 말하지만, 버틀러의 계보학은 그런 욕망이 선험적으로 원인이라 가정해두는 정신분석학의 전제에 들어 있는 규범을 보여주고자 한다. 푸코의 『성의 역사』에 나타난 억압가설 비판처럼, 금지구조나 사법구조는 원래 억압해야 할 욕망을 전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욕망 역시 당대의 지배적 권력구조가 만들어낸 구성물임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몸이 영혼의 감옥인 것이 아니라, 영혼이 몸의 감옥이 된다.
마지막 3부 「전복적 몸짓들」은 줄리아 크리스테바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된다. 크리스테바는 기본적으로 모든 섹슈얼리티를 이성애로 상정했고, 동성애는 정신병에 가까운 것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버틀러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녀의 이론은 재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이성애를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에 모성성을 특화하고 있으며, 라캉을 극복하려던 저항의 시도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코라나 기호계, 혹은 모성적 육체는 상징계의 언어로 발화되지 않으면 인식 불가능한 것으로서 저항의 전복적 실천력을 상실했으며, 오히려 크리스테바의 논의는 모성의 재생산을 강화하고 어머니를 이상화하여 가부장제를 공고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비판이다. 위티그나 푸코 역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위티그는 레즈비언 주체를 제3의 주체로 이상화하면서, 또다시 어떤 이상적 대상으로 고정하는 실수를 범했다고 비판당한다. 보편적 주체의 관점에서 논의를 진행했던 푸코는 남성을 보편 주체로 인식할 뿐 여성이라는 성차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간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을 받아왔는데, 버틀러는 여기에 더해서, 푸코가 에르퀼린 바르뱅의 일기에 부치는 서문에서 『성의 역사』와 달리 양성인간 에르퀼린이 제도 규범하에서 겪었던 사회적 비극보다는 특정 섹슈얼리티의 낭만화와 이상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비판한다. 마지막에 버틀러는 메리 더글러스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논의를 끌어와 몸의 경계와 표면은 정치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몸의 범주를 자연스럽지 않은 것으로 만들면서 새로운 의미화의 장으로 열어낼 때, 섹스와 젠더와 섹슈얼리티는 이분법을 넘어서 모든 고정된 범주를 파괴하며 전복적 재의미화를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버틀러가 주장하는 패러디적 수행성이고, 우울증적인 반복 복종의 실천들이다.
버틀러는 이 책의 결론에 해당하는 장의 제목을 ‘패러디에서 정치성으로’라고 썼다. 이는 드래그나 복장 도착 등의 ‘젠더 패러디’에서 출발한 젠더 논의가 수행성, 반복 복종, 그리고 우울증이라는 여러 이론적 비판과 재검토, 재의미화의 과정을 거쳐 ‘퀴어 이론’이라는 정치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은 근 20년이 지나도록 페미니즘 이론의 중심에 자리하며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그 특유의 어려운 문체로 읽기가 쉽지 않다. 그녀는 1999년 미국의 학술지 『철학과문학』에서 ‘최악의 저자’로 뽑혔을 만큼 미국 내에서도 난해한 글쓰기로 악명이 높다. 그러니 그 해석과 번역은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 해서 이 책에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맨 앞에 『젠더 트러블』의 핵심 용어를 정리한 「버틀러의 주요 개념들」과 『젠더 트러블』의 내용과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을 쉽고 간결하게 알려주는 「옮긴이 해제」를 덧붙였다.
원문 링크 :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 ··· D2464216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 3회의 주제는 아킬레스건이다. (이 드라마는 매회 주요 주제를 제목으로 제시해준다. 한 회에 주제가 2개 이상인 경우도 있다.) 준영(송혜교 분)의 아킬레스건 중 하나는 '너는 쉽다', '진지하지 못하다', '생각이 없다' 등이다. 사랑하는 연인에게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동기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듣는다. 준영의 아킬레스건에는 엄마(혹은 엄마에 대한 준영의 감정),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다룸에 있어서 '직구'인 자신의 성격 등이 추가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킬레스건은 고정된 것이라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상황에서는 진지하지 못한 것이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으나 어떤 상황에서는 아닐 수도 있는 것. 어쩌면 아킬레스건은 앞서 주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사후 발견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황이 다 지나간 후 알게 되는 것이다.
준영은 이 아킬레스건들로 인해 쌓인 감정들이 일상에 깊숙하게 들어와서 다른 일들에까지 영향을 미치자 적극적으로 풀기 시작한다. '부탁인데 다음에 사랑을 하게 되면 제발 진지해져'라고 말한 전 연인에게 전화해서 진지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타인의 감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만을 일방통행적으로 전달하는 그에게 화를 낸다. 자신에게 '쉽다'는 말을 한, 이제 막 사랑을 다시 시작할 이에게는 자신이 뭐가 쉬운지, 쉬운 것은 자신이 아니라 당신이라고 말한다.
이 감정 선들의 연결이 내겐 매우 설득력 있게 보였다. 배우 캐스팅에서 문제가 생긴 직후 자신의 옛연인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감정을 갑자기 표현하는 장면. 드라마 제작과 연인 간의 감정은 객관적으로 볼 때야 아무 상관이 없으나 주체의 주관적 감정 상태에서는 매우 긴밀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제 생긴 불편한 일 때문에 오늘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일들에 짜증을 부리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활동 할일이 많고 그와 관련해서 생각이 많아 질 때 항상 나는 감성이 예민해지며 짧은 슬럼프에 빠지게 되는 것 같아. 이럴 때 옛날 일을 떠올리게 돼. 오늘도 그랬어. 그러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 과거는 항상 미화된다는 말조차도 과거에 대한 미화이다. 과거는 미화되어서 조작되는 것보다 사실은 더 무서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이 생각의 끝을 잡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저녁에 네가 남긴 글을 봤어. 경주. 이 두 단어를 누르는 순간 난 대학 1학년 때로 가버렸어.
여행. 수능을 마친 수험생 중에서 이 단어를 떠올리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마도 대부분이겠지. 하지만 이 단어를 실행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아마 몇 안 되지 않을까. 이것이 일상의 무서움이지 않을까. 지겨운 일상이지만 쉽사리 떠날 수 없고,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것.
수능이 끝나고 여행을 꿈꾸었어. 대학 1학년 겨울 경주에 가보리라. 그래서 수북하게 눈이 쌓인 불국사 앞 흙 마당을 걸어보리라. 그리고 난 이제 무엇을 하며 살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리라. 감은사터에 가서 3층 석탑을 보며 꿈을 다져보리라. 감은사가 터로만 남아 있는 역사적 슬픔을 머금고 꿈꾸리라.
하지만 대학 4년 반 동안 경주에 간 적은 없어. 그래서 경주는 내게 ‘환상의 도시’야. 실제 경주가 어떠한지는 몰라. 그저 내가 상상한 경주, 이제 이것만이 내게 남았지. ‘환상의 도시’ 경주가 아련해질 때쯤 여행은 내게 그 어떤 매력도 주지 못했어. 친구들끼리 난 어디로 가고 싶어, 그곳의 어디어디는 참 좋지, 넌 어디로 가고 싶니. 이렇게 물어올 때. 난 특별히 가고 싶은 데가 없는데. 그렇게 여행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어. 하지만 사실은 말이야. 이것은 여행이 뭔지 모르는, 철없는 자가 하는 무식인지도 몰라. 여행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여행을 꿈꿀 수 있을까. 영화와 드라마, 소설에서 수 없이 보여주는 여행은 영화와 드라마가 체 끝나기 전에, 아니 그 속에서의 여행을 마주치는 순간 별 실현성 없는 이야기로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영화와 드라마는 학습을 해주지 못하는 걸 거야. 여행은 이렇다 저렇다 말이지. 여행에 대한 무식. 이것은 무식한 자의 용감함인 거야.
1학년 때 경주와 여행을 하지 못한 난 어떻게 그 후를 살았을까. 꿈은 꾸었을까. 꿈을 꾸었지만 꿈대로 살았을까. 난 꿈, 그 자체를 꿈꾸고 살지 않았나 싶어. 언제나 꿈을 꿈꾸었어. 아니, 꿈을 꿈꾸려 했어. 그래서 꿈을 묻고 또 묻고. 그리고 잊고 또 잊고. 꿈을 꿈꾸지 않는 자가 과거를 꿈꾸려고 해. 그리고 꿈꾸는 과거 속에서 잠이 드는 거야. 결코 깨어나지 않는 꿈을. 어때, 무섭지 않니? 과거는 항상 미화되거나 말거나 무서운 걸 거야.
하지만, 과거를 꿈꾸지 않고 우리는 살 수 있을까. 아니 과거를 꿈꾸지 않는 것이 사는 걸까. 과거 속에 잠들지 않고 우리는 꿈꿀 수 없을까. 모를 일이야. 그렇지? 그럴 일이지. 나는, 오늘 무엇을 꿈꿀 수 있을까. 아니 꿈을 꿀 수나 있을까.
이제 다시 경주 여행을 꿈꾸어야 할 때가 왔는지 몰라. 대학 1학년. 인간 세상을 처음 본 것처럼, 거인과 같은 인간을 처음 본 것처럼, 모든 것을 신기하게 놀라워하던 그런 스머프가 되어야 할지 모르겠어. 그리고 너는 서울도 경주도 강원도도 아닌 다른 곳을 꿈꿔봐.
일 년을 살아도 하루를 산 것 같지 않은 어느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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